박영수의 문화답사


 


 

◈영남포정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성에 현존하는 최고의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그 전신은 망미루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2층으로 신축했다.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목 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 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상남도청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됐으며 1925년 도청 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다.

◈공북문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이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한다.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진주성 우물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당시부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 후기 진주성에 표시돼 있는 3곳의 우물 가운데 하나다. 임진년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의 관군과 백성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됐던 것을 2013년 진주시가 발굴·복원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으로 된 우물로 14단의 토관과 오수 유입 방지를 위한 둘레돌이 확인돼 근대까지 개조와 재활용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복원된 우물의 크기는 깊이 8.4m 직경 1.5m이다.

◈북장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호
북장대는 진주성 북쪽 지휘소로 진남루라고도 부른다. 광해군 10년(1618) 남이홍이 중건했으며 조선 중기의 다락집 형으로 후대 군사시설의 모범이 됐다. 북장대는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성 밖은 물론이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사까지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은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서부 경남의 고고학적 연구 조사를 담당하는 국립기관으로 1984년 11월 개관했다. 이후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내에 위치해 있는 입지조건과 임진왜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8년 1월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가 1997년부터 국내외에서 임진왜란 관련 유물 약 600점을 대여받았으며, 다시 1998년에 56점을 수집해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간의 흐름을 위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결과 및 후대평가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향에서 관련된 유물 2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1년 11월 19일 국립진주박물관은 새롭게 두암관을 개관하면서 다양하고 품격 높은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이다. 1607년 병사 김태허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됐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했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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