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년(1592)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에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해 건립된 제단이다.
임진왜란 진주성 1차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이 왜군 2만여 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친 임진년의 진주대첩을 기리고, 이듬해인 계사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민·관·군 7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한 역사적 기록이 새겨진 곳이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은 1987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룩한 주인공으로 이러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 바로 김시민 장군 전공비다. 다른 이름으로는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라고도 부른다.
선조임금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을 무찔렀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운 인물을 대상으로 상을 내렸는데 김시민 장군은 2등 공신으로 선무공신교서를 내렸다.
보물 제1476호 지정된 김시민선무공신교서는 진주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촉석정충단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촉석정충단비는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12년(1686)이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해 기술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한 고종후,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한 김천일, 최경회의 행적이 기록돼 있으며, 황진 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이 기록돼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의 전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비다.

◈쌍충사적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일명 제씨쌍충비라고도 부르는 이 비는 임진왜란 때 크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 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제말 장군은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말 장군의 조카인 제홍록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이에 정조임금이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쌍충각이라 이름해 진주성과 성주성에 각각 세우게 했다.
본래 이 비는 진주성 안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관헌들에 의해 문산가도에 옮겨졌다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비각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김시민 장군 동상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호국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진주성 수호상으로 2000년 1월 1일 제막했다. 높이 7m, 면적 225㎡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 시호는 충무이다. 무과에 급제, 훈련원 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가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했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진주목사가 돼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대첩을 이뤘으나 김시민 장군은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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