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어느 특정한 감각이나 스타일로 패션의 시대다. 나만의 액세서리가 있고 나만의 트렌드가 있다.
입술 위의 치장을 위해 립스틱이 있고, 손톱 위의 치장을 위해 매니큐어가 있고, 발톱 위의 치장을 위해 페디큐어가 있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넥타이, 머플러, 가방, 구두, 모자, 옷, 패션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를 도와주는 것들, 즉 명사를 수식하거나 보어 역할을 하는 것들을 형용사라고 한다. 동사 및 형용사 같은 부사를 수식하기도 하는 걸 부사라고 한다.
교과서적인 형용사나 부사의 쓰임이나 용도는 이쯤하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는 형용사나 부사가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자기만 대단한 줄 아는 사람, 세상에 자기만 로맨스를 아는 줄 아는 사람, 세상에 자기만 비밀을 가진 줄 아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인기에 영합하는 수많은 형용사가 난무하는 포퓰리즘은 이젠 식상하다. 진보와 보수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참으로 요란스러운 걸 우리는 보았다.
자기만의 패러다임, 자기만의 메커니즘도 좋다. 그러나 자기 손바닥 안에 있다는 세상이 뭐 그리 대단하랴. 자기만의 액세서리는 개성이다. 빨간 구두가 되었든 백 바지가 되었든 무슨 상관이랴. 쌍가락지를 끼든 선글라스를 끼든 무슨 관계이랴.
미적 감각을 되살리고 아름다운 예술이 되는 시대의 패션.
패션은 변한다. 군복도 패션이 바뀌고 한복도 패션이 바뀐다.
가브리엘 샤넬은 말한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고.
신은 내편이라고 온갖 미사여구를 널어 놓는 형용사를 나는 싫어한다.
대나무는 푸른색이라는 형용사 하나만 가져도 푸른 대나무라고 지조며, 절개며, 인내를 일컫는다.
대나무는 마디가 많아도 평생 입을 열지 않아 누설 않는 한평생이라고 곧게 자란다.
소나무는 푸른색이라는 형용사 하나만 가져도 푸른 소나무라고 굳센 정절을 일컫는다. 가지가 많아도 평생 한 색깔이라 불로장수라는 소나무.
명사에 붙이는 형용사는 숫자가 많을수록 명사의 가치를 떨어뜨릴지도 모른다.
변명이 많으면 진실이 희박하다.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도 많을수록 동사가 힘들다.
글의 문장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 형용사를 많이 붙여 복잡하게 살면 좀 피곤하지 않겠는가.
삼베나 모시는 형용사를 붙이지 않아도 시원하다.
찜통더위란다. 형용사나 부사를 붙이지 않아도 시원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형용사나 부사를 붙여도 꽃 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형용사나 부사는 인생의 추임새다. 글을 쓰다가 중요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인근 술집에서 와인을 취하도록 마셨다는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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