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연금술사는 말한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진실이 하나 있어.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기도는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실천의 동사로 하는 것이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동사다.
명사의 공은 그 모양 그대로인데 움직이는 동사 때문에 축구나 야구에 스타가 있고 테니스나 골프에 여왕이 있고 황제가 있다.
발이 움직이는 동사가 있어야 백운산 칠족령 전망대에서 동강의 비경을 볼 수 있다.
발이 움직이는 동사가 있어야 태국의 수상시장 메클롱 강물에 붉게 물드는 불빛을 보며 새우어묵을 먹을 수 있다.
보라. 그대로 있으면 명사라는 그림이지만 마음이 움직이면 동사가 되는 누드화를.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는 프레더릭 레이턴의 ‘프시케의 목욕’이거나 앙리 마티스의 ‘옷을 걸친 누드’이거나 애너 리 메리트의 누드 ‘닫힌 사랑’을. 윌리엄 스트랭의 ‘유혹’이거나 윌리엄 에티의 ‘칸타올레스’이거나 피카소의 ‘앉아 있는 누드’가 마음이 동사가 되면 감동이 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르누아르의 풍만한 여인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저 뚱보일 수밖에 없고, 고야의 ‘옷을 벗은 여인’도 그저 알몸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힘든 일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유는 동사가 하기 나름이다. 손과 발이, 마음과 몸이 움직이는 동사가 될 때에는 논어의 요왈편을 따르면 어떨까.
은혜를 베푸는 건 좋지만 낭비는 안 된다는 혜이불비(惠而不費), 남에게 일을 시키되 원망을 사서는 안 된다는 노이불원(勞而不怨), 의욕을 부리는 건 좋지만 탐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욕이불탐(欲而不貪), 아량을 지니는 건 좋지만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태이불교(泰而不驕), 위엄을 갖추는 건 좋지만 사나워져서는 안 된다는 위이불맹(威而不猛).
지금도 지구가 진화를 하고 우리가 사랑을 하는 건 움직이는 동사 때문이다.
자유, 정의, 평등, 평화에는 예외가 있을 수도 있지만, 병원 의사가 하는 ‘걸어’라고 하는 동사의 말에는 그 어떤 환자에게도 예외가 없다.
절망의 해독제는 행동이라고 존 바에즈가 말했다.
동사는 생명이다. 동사는 인생이다. 
동사와 형용사는 명사, 대명사, 수사 따위의 체언이 서술어로 바뀔 때 갖추는 용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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