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충절의 도시, 진주 (2) 진주대첩과 전후 2차 공방전

박영수의 문화답사 박영수l승인2017.09.20 18:00:30l수정2017.09.22 13:19l10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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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문

진주대첩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때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죽음으로 나라를 지켰는지 따라가 보기로 하자.
진주성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 연안에 위치해 동(東)은 함안 진해, 남(南)은 사천 고성, 북(北)은 의령을 접하고 서(西)는 단성 곤양 하동을 통해 전라도에 이르는 요지로서 목사(牧使)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목사 김시민은 본시 진주의 판관으로 전 목사 이경의 후임자로 성을 지키게 됐다.
이때 부산의 왜장 하세가와 도오고로오는 김해의 왜군 3만여 명을 규합해 우도(경상도 서역)로 침입하는 동시에 또 수군을 발해 웅천 해안에 둔거해 전라도 군사의 진로를 방해하려 했다. 우병사 유숭인이 왜장 도오고로오를 맞아 창원에서 싸우다가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물러서니 왜군은 승승해 함안으로 쳐들어와 진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때는 임진년 10월 5일.
적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총탄이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한 사람도 맞지 않았다. 얼마 뒤 총소리는 그쳤으나 성 안에서는 일부러 태연함을 보이기 위해 고요히 여러 악기를 연주했다. 그러자 적은 성 동북쪽에 누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성 안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아댔다. 이에 김시민이 화약을 넣은 화살을 발사해 그 누각을 격파, 적으로 하여금 그 꾀를 쓰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서로 5일을 버티고 있는 중 6일 밤, 적병들이 갑자기 성 안으로 기어오르려 하자 성 내에서는 미리 준비해 뒀던 마른풀에 화약을 싸서 성 밖으로 던지고 큰 돌을 내리 굴리며 끓는 물을 끼얹기도 했다. 마침내 왜적은 큰 손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때 김시민이 화살을 쏴 수많은 적병을 쓰러뜨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날아온 적의 유탄을 이마에 맞아 유혈이 낭자했다. 그는 끄떡하지 않고 계속 싸웠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시민은 신음하기 달포 만에 부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김시민, 그는 육지의 이순신이라 할 만큼 잘 싸워 대승리를 거두고 죽었다. 그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부하들을 아꼈으며 병사들과 한 마음 한 뜻이 돼 마침내 적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임진 10월의 승첩으로 제1차 진주 싸움이다.
해는 바뀌어 계사년. 왜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전년의 진주성 싸움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분투했다. 이때 명나라는 화친으로 왜적을 물러가게 하려는 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명장으로 적군을 뒤쫓아 남하한 자는 대개가 안병부전(按兵不戰: 군사를 한 자리에 멈추고 싸우지 않음)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해 명의 총병 유정은 대구에서 격문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내 진주성을 재침공하려는 계획을 힐책하고 유격 심유정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그 불가함을 역설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우리 편 군사들은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이하 관병과 의병이 모두 의령에 모여 있었으나 감히 먼저 치지 못했다. 권율이 제장을 꾸짖어 강을 건너 함안에 이르렀으나 내습하는 적군의 기세가 너무 어마어마해 모두 달아났고 권율과 김명원 등은 먼저 호남으로 피해 들어갔다.
오직 창의사 김천일만이 제장에게 이르길 “진주는 호남과 순치(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의 땅이다. 진주가 없이 호남이 있을 수 없다. 성을 버리고 적을 피해 적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비계(非計)이다. 힘을 다해 막는 건만 못하다”라고 했으나 제장은 응하지 않고 흩어져 가는 사람이 많았다. 김천일은 이에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등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니 이때 김해 부사 이종인은 먼저 입성해 있었다. 성내 군사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 남은 백성들은 무릇 6,7만에 달했다. 그리고 먼저 이방장 강희열 이잠 등이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목사 서예원은 본래 겁이 많고 병법을 알지 못했으므로 모든 방수防守의 계책이 김천일에게서 나오니 주객이 서로 맞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의 군병과 우리 편 군사들은 다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 진주성은 저절로 고립 상태에 빠졌다.
김천일은 제장으로 하여금 부대를 나눠 구역별로 성을 지키게 하고 황진,  이종인, 장윤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기동적으로 돌아다니며 구급 응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와 같은 분담과 약속이 이미 정해지자 모든 장졸들은 다 죽길 맹세했다.

 

박영수  kslee@hap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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