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전 국민이 패닉에 빠졌다.
조그만 달걀 한 알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냉장고에 있는 걸 버려야 할지, 두고 봐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아무도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인류에게 최고의 영양을 제공해 왔던 달걀이 애물단지가 됐다.
현대의 동물들은 생명으로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지만, 예전엔 소가 집 다음으로 소중한 재산이었다. 농경사회의 소 한 마리는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든든한 생명줄이었다.
조선시대 한 농사꾼의 집에 아기가 태어났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는데도 군적에서 삭제되지 않았는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또 군적에 이름이 올랐다. 아빠까지 세 사람이 군적에 등재. 군적에 오른 사람은 세금으로 군포를 내야 한다. 부부가 쉬지 않고 힘들여 농사를 지어도 죽은 아버지와 갓난아기의 몫까지 세금을 부담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아내가 관아에 찾아가 가혹함을 하소연했지만, 무자비한 가렴주구는 오히려 집에 달려와 세금체납의 대가로 소를 잡아가 버렸다. 극도의 좌절감에 빠진 남편을 달래기 위해 아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 방안은 피가 흥건했다.
남편은 칼로 자른 자신의 성기를 들고 울부짖었다. “아이 낳은 죄로구나! 부잣집은 쌀 한 톨 바치지 않으면서 일 년 내내 풍악이 울리거늘,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할 수가 있는가…”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릴 만큼 소를 잃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에 나오는 이 ‘실화’는 세금제도가 공평하지 않으면 국민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되는지를 절절하게 들려준다.
농사에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던 소는 더 이상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다. 현재의 소는 오로지 젖과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예전에 소는 외양간이나 목장에 살았지만, 지금은 ‘공장’에서 밀집사육 당하며 ‘대량생산’된다. 지방이 골고루 퍼지게 하기 위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공간에서 정해진 사료만 공급받으며 ‘고기’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돼지는 더하다. 어미 돼지는 스톨이라는 철제 틀에서 평생을 보내며 인공수정과 출산만을 반복한다. 스톨의 크기는 가로 60㎝, 세로 210㎝ 정도. 이 좁은 공간에서 운동능력을 상실한 돼지엄마는 밖에 나와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서로 공격하거나 자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앞니를 뽑아버리기까지 한다.
‘닭 공장’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닭들은 4~5층으로 겹겹이 쌓여진 케이지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목만 겨우 나올 수 있는 구멍을 통해 물과 사료를 먹는다. 이런 양산체제 덕분에 우리는 싼 값에 고기와 우유와 달걀을 먹는다.
그러나 이렇게 사육되는 동물들이 정상이길 바라는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와 돼지는 구제역이, 닭은 조류인플루엔자가 돌기 시작하면 ‘살처분’이란 이름으로 집단 떼죽음을 당한다. 저항력이 제로에 가까운 동물들은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집단 감염된다.
살충제가 살포된 닭 공장의 상당수는 ‘친환경’ 인증을 받은 곳이라 한다. 보온력이 매우 탁월한 털옷을 입고 서로 밀착해 사육당하는 한 여름의 양계장은 고온 속 배설물과 악취로 뒤범벅이 돼 있다. 이런 곳에서 친환경이 가능하긴 한 걸까?
그래도 식탁에 놓인 두툼한 고깃덩어리에 군침이 도는 건, 아무래도 닭의 머리와 비슷한 수준이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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