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편이 된다는 것 보다 더 힘든 것이 아버지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씨앗의 법칙이 있지만, 너무 일찍 아버지가 되어버린 스물두 살의 아버지, 지상은 온통 초록이고 하늘은 온통 무지개였지. 누구의 말마따나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야 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 진양군에서 만나고 진주에서 만나고 마산에서 만난 사람이다.
3,200원 짜리 금반지 한 돈에 사랑을 증표로 하고, 첫날밤에 생긴 아이가 책임을 지라는 울음소리인 줄도 모르고 무작정 좋아만 했던 아버지의 기쁨. 그 옛날엔 물이 좋고 공기가 좋아 그런지 마디마디 열리는 조롱박처럼 새끼들도 주렁주렁이었지. 그때는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삼신할미의 말씀이 절대적이라, 새끼가 아무리 많아도 정부에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정부도 그저 알맞게 낳으라는 권유만 있었지. 아니,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고 걱정이 되어 새끼를 안 낳는 수술을 하면 예비군훈련도 면제를 시켜주었다지.
어쨌거나 핍박한 호주머니가 슬퍼도 누구의 아버지라는 그 말에, 판도라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아버지는 거친 황야를 적토마로 달린다.
세상에서 무슨 기쁨이 크다 해도 자식들 커가는 기쁨에 비할 소냐. 세상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다 해도 자식들 잘 되는 일에 또 비할 소냐. 바라만 보아도 좋다.
아버지가 어디로 먼 길을 떠나는지 윤석중의 ‘먼 길’이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뚱말뚱 잠을 안 자고

그래서 요즈음도 청문회 때마다 새끼들 때문에 위장전입을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곤욕을 치른다는 나쁜 아버지들. 아버지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 왜 이기적인 것인 줄을 잘 모른다. 그 조그마한 유전자 하나가 무슨 대수라고 대신 피를 흘리고 대신 아파하며 대신 망신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
판자촌 아랫목에는 아이들이 잠들고, 걸레가 얼어붙는 윗목은 아버지의 자리였지. 세상의 모든 온기를 모아 아랫목으로 보내는 아버지.
첫 걸음마를 하고 첫 입학을 하던 때는 하늘이 부럽지 않은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5만 번의 훈련 끝에 나온다는 서툴고 어눌한 ‘아빠’라는 그 소리에 천지는 황홀하였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운동회 때는 손을 잡고 달린다.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는 희끗희끗한 머리털 때문만은 아니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의 머리칼에도 무서리가 내리니 헛기침이 잦아진다.
좋은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 줄도 잘 모른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돌아가신 후에야 좋은 아버지였다는 것이 슬프지만, 사랑은 왜 하늘이 무너져 내린 다음에야 깨닫는 것일까.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자식들에게 자장면을 사주고, 힘이 들어도 힘이 든다는 말을 금지하며,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일까.
추운 겨울밤 퇴근하면서 따끈한 호떡을 사들고 달려가는 집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새끼들이 있고, 나는 아버지라는 기쁨 때문에 가슴이 출렁거렸지.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오늘 저녁에도 별이 저토록 빛나는 건 틀림없이 당신들을 위한 반짝임이다. 경비원이면 어떻고 미화원이면 어떠리.
일터에서의 그 무거운 짐들은 다 내려놓고 집에 다 와가면 웃어야 한다. 왜 그리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동네에 들어서면 누구의 아버지고 집에 가면 새끼들의 아버지니까.
혈통을 직접 이어준 남자, 아버지는 위대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라는 그 위대함보다 더한 위대함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아니어도 괜찮다. 자랑스러운 아들, 딸들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초월한 그 복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랑보다 못할 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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