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어려울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아버지다. 고단한 삶이 절뚝거려도 새벽길을 가는 사람이 아버지다.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 전치사로 붙여지는 수많은 아버지들. 친아버지, 친정아버지, 시아버지, 의붓아버지, 새아버지, 양아버지….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고, 사이비가 많아도 하늘 아래 배산임수로 사랑의 진수를 간직한 사람, 바로 아버지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지는 꽃잎은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흘러가는지 흐르는 강물은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렇다. 버팀목도 기댈 곳도 없이 잘 삭은 식혜 알처럼 둥둥 떠서 천년 꿈을 꾸는 사람. 생각이 많아 생각조차 없이 한 뼘도 안 되는 생존의 화두를 안고 사는 사람. 아버지가 그렇다.
얼마나 더 위를 쳐다보아야 하늘을 볼 수 있나요?
얼마나 더 큰 소리로 외쳐야 사람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나요?
밥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고 했지만, 바람도 답을 못내는 게 있으니 아버지다.  천년이 지나야 향기를 내는 침향은 얼마나 행복한가.
만년이 지나도 향기가 없는 그 아버지를 나는 예찬하노라.
천태만상으로 부침하여 역사의 물결이 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나는 종의 기원이나 인간의 기원 같은 건 모른다. 나는 과학이나 종교 같은 어려운 것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가 있어야 새끼가 있다는 그저 보편타당한 진실만을 알 뿐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거나 자식을 사랑하는 게 부성애라 했던가. 온몸을 던지는 부성애는 꼼수가 없다.
아버지는 위로받기를 기원하는 천도제도 필요 없고, 휘몰이로 몰아치는 세상장단에 추임새도 필요 없다.
범띠 아버지가 아니어도 생존을 위해선 용감하고, 소띠 아버지가 아니어도 가족을 위해선 열심히 일을 할 뿐이다.
실낱같은 확률에 매달리는 청춘의 아버지도, 청춘을 다 바친 은퇴의 아버지도, 병원을 전전긍긍하는 노년의 아버지도, 마음이 향하는 로드맵은 어디이던가.
누군가에게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사람. 천상과 세속을 연결시키고, 등대에 불을 밝히며, 불가사의한 화엄경을 오늘도 만드는 사람.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다.
강렬한 피사체가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흑백사진의 앨범을 넘긴다.
세상의 무게를 말하지 않아도, 특별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아버지의 저울이 그기에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형벌을 받아도 내가 받겠다는 사람. 자식을 위해서라면 천벌을 받아도 내가 받겠다는 사람. 자식을 위해서라면 팔만 사천도의 화탕지옥도 내가 들어가겠다는 사람.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다.
전파나 지면을 파노라마로 도배하는 잡스런 감정배설이 그네를 타고, 블록버스터의 전율로 포퓰리즘의 민주주의가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세상이라도, 당신도 따뜻했으면 좋겠고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당신도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지장보살 같은 사람. 열이 있을 때에는 해열진통제가 되고, 염증에는 소염진통제가 되고, 부패에는 방부제가 되고, 전염병에는 예방주사가 되는 사람.
이면계약의 안전장치가 없어도 모두가 아니면 전부를 거는 사람.
전우의 시체를 넘고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6월의 사람.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다.
석류꽃이 피고, 밤꽃이 피고, 접시꽃이 피고, 울 밑에선 봉선화로 손톱에 물을 들이며, 담장의 능소화를 바라보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옛날에는 보릿고개라고 했지.
아버지가 살다 가신 보릿고개가 보들레르의 ‘악의 꽃’으로 다가온다.
교훈이나 도덕을 가르치거나 설교하지 않아도 악도 꽃이라는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노래한 악의 꽃이 바로 아버지가 아닐까.
알바트로스가 되고 이방인이 되는 악의 꽃. 별별 세상에 별별 일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악의 꽃.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아버지의 입김처럼 뜨겁다. 자규새의 한 맺힌 사연과 울음이 나무가 되고 꽃이 되어 공작의 날개처럼 자귀나무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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