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위기의 노후 아파트들 - 5. 에필로그-자치의 함정

 

▲ 2013년
▲ 2017년

옥상방수공사 비용 최상층 가구 단독 부담하는 경우까지

수도권에 위치한 4개동 122가구의 모 아파트. 1983년 3월에 입주를 시작한 이 아파트는 오래전부터 재건축 얘기가 돌았던 곳이다. 단지 규모는 작지만 인근 빌라들과 단독주택 지구를 묶으면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판단 하에 몇몇 건설사들이 접촉을 시도했지만, 각 집단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지지부진하다가 지금은 재건축 얘기가 뚝 끊겨버렸다. 외곽 신도시 개발로 구도심 재건축에 대한 매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 건설사들은 발길을 돌렸고, 재건축 위원회는 입주민 돈을 걷어 활동비 등으로 쓰다가 소송전까지 벌어졌다.
입주민 A씨는 “결혼 전 재건축 정보를 믿고 시세보다 비싸게 주고 아파트를 구입했는데, 첫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다”며 “이젠 재건축 희망을 접고 깨끗한 곳으로 이사 가고 싶어 집을 내놨지만 팔리지 않아 큰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심의 작은 아파트들이 딜레마에 빠졌다. 30여 년 전 입주할 당시만 해도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서구식 주거문화가 주는 편리함에 젖어 자랑스러웠지만, 지금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형편이 됐다.
화단은 황폐화된 지 오래고, 단지 내 도로도 군데군데 파이고 갈라져 비가 오면 웅덩이로 변한다. 가로등이 나가고 화재경보장치가 먹통인데도 상당수가 수년째 방치되고 있다. 최초 입주민들이 떠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지금은 노인, 맞벌이 가구 등이 대부분을 차지해 입주민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주민자치의 기본은 많은 입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종합해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민주주의의 대전제가 필요조건임에도 그 원칙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시설보수가 필요한 때에도 제때 대처하지 못해 더 큰 피해를 야기한다.
부동산 관련 학자나 정부 관계자들은 “쉽게 슬럼화하는 외국의 아파트 단지들과 달리 한국의 아파트는 관리가 잘 돼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3만 여개에 이르는 전국의 아파트 단지들 중 관리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는 ‘의무관리단지’는 1만5,000여 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공동주택관리법 등의 적용을 받지 않아 사실상 방치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구수로 따지면 의무관리단지에 거주하는 입주민이 훨씬 더 많겠지만 단지수로만 보면 절반의 아파트들이 ‘비의무관리’ 신세에서 급격한 슬럼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적지 않은 수의 작고 노후한 단지에선 주민대표 한 사람이 수년째 총무와 경비까지 겸하면서 정문초소를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가 (비록 소액이지만) 관리비를 걷어 어떻게 쓰고 있는지 질문조차 하지 못한다. 어느새 권력이 된 것이다.
‘옥상방수’는 전체 입주자가 비용을 부담해 주기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중요 공사 중의 하나다. 철근콘크리트 구조체에 물이 스며들면 내구력이 크게 저하된다. 의무관리단지라면 그동안 모아둔 ‘장기수선충당금’을 집행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비의무관리 단지에선 당장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최상층 거주자가 자비를 털어 공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본지 6월 7일자 1면>
아래층 주민들은 ‘내가 당한 일’이 아니므로 ‘공사비 각출’에 부정적이었다. 이와 유사한 일은 도처에서 벌어진다.
비의무관리 아파트들을 다녀보면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이놀이터가 없는 곳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다. 미끄럼틀과 시소 등 최소한의 기구를 갖춘 놀이터가 있긴 했으나, 몇 년 전부터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이 강화되면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기구들이 모두 철거됐다. 이들 아파트는 평소에 적립해 둔 돈도 없을뿐더러, 새 시설을 설치하는 데에도 주민의견이 맞서 결국 휑한 공터만 남게 됐다. 이런 곳의 아이들은 이웃 아파트로 원정 가, 눈치 보며 놀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100% 주민자치에만 맡겨둘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 지를 이런 현상이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아파트를 아파트답게 유지시켜 주는 핵심장치는 ‘공동주택관리법’이고, 그 법의 핵심이 ‘주택관리사제도’와 ‘장기수선제도’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모든 아파트에 차별 없이 공동주택관리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각에선 비용부담 증가나 주택관리사 일자리 늘리기라며 부정적 견해를 보이기도 하지만, 작고 노후한 아파트의 심각한 상황을 직접 맞닥뜨려보면 그게 얼마나 한가한 소리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급격한 노후화를 보이는 아파트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란 점이다. 지금부터라도 국가기반시설을 바로 잡는다는 마음으로 전문관리를 도입해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어떤 게 더 경제적인가.
자치의 함정에 빠진 위기의 노후아파트들. 베이비부머의 은퇴와 함께, 30여 년 전 대량 탄생한 ‘아파트부머’들이, 지금 대량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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