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위기의 노후 아파트들 - 3. 관리부재가 노후화 부채질

 

 

소규모 공동주택에 사는 A씨는 비가 내린 지난달 23일 조심조심 계단 손잡이를 잡고 1층으로 내려와야 했다. 1984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계단 신주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계단은 마찰력을 잃어 물기가 있는 날 자칫하면 넘어질 수도 있었다. 
올 초 크게 미끄러질 뻔한 A씨는 논슬립을 구매해 직접 달아볼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막상 시도할 시간도, 제대로 달 수 있을지 확신도 없어 그만뒀다.
계단뿐 아니라 33년 된 벽에서도 세월의 흔적은 묻어났다. 한쪽 벽에는 길게 금이 가 있어 육안상 위태로워 보였다. 당장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만 벽을 타고 번지는 갈라짐 현상을 보며 걱정이 앞섰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엔 아스팔트가 내려앉아 물웅덩이가 듬성듬성 생겼고 고령의 경비원은 경사로 아래쪽 하수구에 긴 꼬챙이를 넣었다가 빼길 반복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스무 대 남짓 차를 댈 수 있는 지하주차장 입구는 빗물에 떠내려온 나뭇잎, 흙, 비닐 때문에 자칫하면 하수구가 막힐 위험이 있었지만, 제때 하수구 청소를 했던 기억은 없다. 몇 년 전 장마철에도 차량 몇 대가 침수된 후에야 아파트 자치운영위는 ‘장마철에는 지하주차장에 가급적 차량을 주차하지 말아 달라’는 공고문만 붙여 놨다.
140가구가 거주하는 경기도의 B아파트 입주민 C씨는 사용료를 제외한 일반관리비로 매달 2만8,000원가량을 내고 있다. 이 아파트는 주간 8시간을 근무하는 80대 경비원 한 명을 제외하면 미화원도 없어 관리직원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경비원 한 명뿐이다.
아파트에는 자치회장과 총무 두 사람이 있지만 만나기가 무척 힘들다. 회장은 가끔 경비실에 얼굴을 비추고 총무는 월말에만 나타난다.

C씨의 계산으로 B아파트는 매달 390만원 정도를 일반관리비로 거두는데 이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C씨는 알 수 없었다. 자치회장이나 총무도 급여를 받는 것인지 또 다른 용처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얼굴을 붉히게 될까 봐 직접 묻지는 못했다.
그나마 자주 만날 수 있는 부녀회장에게 넌지시 관리비에 대해 물었지만 “일반 아파트에 비하면 10분의 1밖에 안 걷는 것”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답만 돌아왔다. 부녀회장은 노인들 식사도 대접하고 꽃밭도 가꾸고 쓰레기도 버리고 아파트에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 때론 ‘자비를 들이기도 한다’고 했다. C씨는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개동 72가구가 거주하는 D연립주택 E씨 집은 지난해 장마 이후 누수가 발생했다. 누렇게 변한 천장에는 둥그런 얼룩이 졌고 물줄기가 벽을 타고 내려오며 벽지를 변색시켰다. 누수 때문에 벽에 걸어둔 가족사진도 떼어내야만 했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방수가 문제였다. 옥상 바닥이 희끗희끗 벗겨져 초록색 방수액보다 시멘트 바닥이 드러난 부분이 더 많았고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이 새고 있었다.
E씨는 이웃들과 비용을 모아 방수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이웃 주민을 만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문을 두드려도 사람이 없을 때가 많았고 저녁식사 시간을 피해 일일이 방문하다보니 하루에 몇 집을 다니기 어려웠다. 세입자가 많아 집주인 연락처를 알아내기까지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어렵게 집주인과 연락이 돼도 “방수 비용을 다함께 부담해야 하느냐”고 되묻거나 “원래 연립주택은 꼭대기 층에 사는 사람이 부담하는 걸로 안다. 나는 못 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E씨는 결국 자비로 방수를 했다. 업자를 찾고 작업을 감독하며 신경을 쓰는 바람에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의무관리의 기준인 300가구(승강기가 없는)에 이르지 못해 방치되고 있는 노후 소규모 공동주택들의 상황이 심각하다. 관리 행정, 회계, 시설관리, 안전관리 분야까지 의무관리 공동주택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적은 인원이 거주하기 때문에 입주민의 직접적인 참여가 쉬울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소규모 공동주택이 처한 현실은 딴판이다. 입주민의 재산과 안전을 도모하고 유지하기는커녕 공터에 무단으로 버려지는 쓰레기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단지도 수두룩하다.
일각에서는 준공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노후화에 따른 불편은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모든 노후 공동주택이 그런 것은 아니다.
경기 부천에 있는 G아파트는 1차 208가구와 2차 130가구를 통합 관리하는 의무관리 단지다. 이곳은 입주한지 33년이 됐지만 같은 시기 입주한 주변의 비의무관리 단지와는 사정이 다르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게시판에는 외부회계감사를 수검했다는 안내문과 공인회계사의 ‘적정의견’ 소견서가 붙어있다. 회계기준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다. 관리사무소는 매달 관리비 부과내역서를 전체 입주민에게 보내 입주민이 낸 관리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린다. 관리직원 급여, 입주자대표회의 회의수당, 자생단체 지원금 등 1원 단위까지 정확히 계상한다.
안전관리자를 겸하고 있는 관리사무소장은 매일 단지 구석구석을 살피며 시설, 안전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가깝게는 매일 단지를 살피고 멀게는 장기수선계획을 수립, 실행하며 공동주택의 장수명화를 견인하고 있는 것도 주변 단지와의 차이다.
입주민들도 자신들의 대표자를 법과 절차에 의해 직접 선출하고 있다. 그렇게 선출된 입주자대표회의는 입주민 의사를 반영해 아파트 운영을 결정한다. 자치회장, 총무가 운영하는 인근 비 의무관리 단지와 일반관리비는 불과 1만원 차이지만 체감하는 단지의 상태는 컸다.
80년대 급격히 지어진 소규모 공동주택들이 30여 년의 세월을 지나 노후화 등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지자체와 관련 법령을 주관하는 정부는 사실상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입주민은 노후 소규모 공동주택이 어떤 면에서 단독주택만도 못한 처지며 ‘합법적 방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자조 섞인 푸념도 전했다. 불과 몇 가구 차이로 의무관리, 비 의무관리로 나뉘어 다른 법을 적용받아야 하는 현행 제도 때문에 소규모 공동주택 입주민들은 사실상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을 권리를 잃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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