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수지에 사는 친구에게서 번개팅 문자가 날아들었다. 미처 보지 못한 영화를 함께 챙겨 보자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압구정동 CGV에서 상영하는가 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결혼 기념일이라고 명동에서 식사를 하기로 돼있어서 친구와의 번개팅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는 친구가 알려준 덕분에 명동 CGV에서 영화를 볼 마음이 일었고 거기서 멋진 사람을 선물처럼 만나서 하루가 행복하게 마무리됐다.  
유럽여행을 가려고 최근에 남편에게 조금 젊어보이는 캐쥬얼 재킷을 마련해주었다. 사람보다 옷이 젊어서 일행에게 옷의 나이로 읽히고 싶었다. 명동에 가면서 실험삼아 입고 나섰다. 물론 나도 다른 날보다 조금 젊게 차려입었다.
강남에 터잡고 산 세월이 30년이다 보니 명동은 여행가듯 찾아가는 동네이므로 첫 여행지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북유럽식 음식을 잘 하는 명동의 스모가스란 뷔페였다. 아껴둔 몇 장의 식사권을 들고 갔으나 그 음식점에서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할 의지가 없었는가 보다. 폐업을 했다. 우리의 식사권은 아끼다가 똥이 됐고 우리의 기분도 구겨졌다.
포기가 빠른 우리는 한식집을 찾아 기념일의 식사를 그럭저럭 마치고 집으로 오다가 명동의 CGV로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갔다. 친구가 말한 영화, ‘마리아와 마가렛’,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등이 있는지를 살피는 가운데 직원에게 프로그램을 어디서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청년은 친절하게 자신이 낱낱이 말로 알려줄테니 고르라고 했다. 상영물이 썩 내키지 않아 선택하지 못하고 있으니, 근처의 다른 상영관을 안내해 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만큼 절박하게 골라볼 마음은 적고 상영하는 영화 중 가장 볼만한 것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소개받은 영화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였다. 그는 내용을 대충 설명해줬다. 티켓을 끊으면서 실버라고 말했는데도 주민증을 요구한다. 내가 실버대상이면 당연히 남편도 그러려니 해야 하는데, 남편도 주민증을 보자고 한다. 조금 의아해하니 죄송하다고, 그렇게 안보여서 보자고 했다면서 고개를 깊이 숙여 미안함을 드러내줬다. 아마 저들의 근무강령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피드백하고 뒤돌아보니 남편의 손에 커다란 팝콘 통이 들려있다. 아내와 극장으로 소풍 온 기분인가 보다.
푹신한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이 앉으면서 그만 팝콘 통을 엎지르고 말았다. 검은 대리석에 달콤한 꽃잎 폭탄이 터졌다. 남편이 종이를 들고 닦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기에 가만히 손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도록 권유했다. 당황스러움을 잠시 진정하고 청소원을 부를 참인데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직원이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두어번의 쓰레질로 흩어진 팝콘 꽃잎을 치워줬다. 우리 부부의 무안한 표정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도시의 천사는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나 문제만 해결해준 게 아니라 팝콘 통을 들고 매점으로 가더니 새로 한 통을 담아다주며 기분좋게 웃어준다. 충분히 짜증날 일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 청년은 오랜만에 아들의 직장에 와 본 아버지에게 하듯 따뜻하고 친절하게 마음을 담아 대해줬다. 어디서 저렇게 센스있는 직원을 채용했는지 명동 CGV란 곳이 직원 한 사람으로 해 감동의 장소로 부각될 것이다. 문자나 영상으로 기업 PR을 하는 것보다 단 한 사람의 인간미 넘치는 친절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명동 CGV의 그 청년은 흰꽃이 피는 계절이면 해마다 내 가슴에서 ‘팝콘 꽃’으로 필 것이다.
최근에 일하는 젊은이에게 줄 책, ‘귀띔’을 펴냈기에 한 권 보내줄 생각으로 명함을 달라고 했다. 거기에 ‘웃음지기 조영민’이라고 적어줬다.
족히 7만원 정도의 식비를 날린 후라 명동에 나간 기분이 찜찜해서 돌아올 뻔 했는데, 그렇게 기분이나 물질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청년이 풍기는 사람향을 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조영민 그는 우리 결혼 기념일에 선물이 돼줬다. 남편은 내게 귓속말로 “우리가 직원채용을 하는 입장이라면 저 청년을 스카웃하고 싶겠다”고 속삭였다.  
앞으로 누군가 내 앞에서 실수를 했는데, 그 일이 조금 심하게 불편할지라도 나는 그 조영민이란 직원을 기억하고 너그러워지리라. ‘밝은 동네 웃음지기, 조영민’은 오늘부터 나에게 감동의 아이콘으로 남을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