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효찰(孝刹) 대본산 용주사(龍珠寺)-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갈양사로 창건된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다. 고려 때 잦은 병란으로 소실된 빈 터에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님의 크고 높은 은혜를 설명한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감동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790년에 절을 새로 지은 것이다.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길지라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륭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했다. 보경 스님을 전국 8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정조대왕의 지원과 백성들의 정성스런 시주로 7개월 만에 용주사를 건립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대왕이 꿈을 꿨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해 절의 이름을 용주사라 했다. 그후 용주사는 효행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주사는 스님들이 모여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를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 또한 정조대왕의 효심을 계승하기 위해 효행교육원과 템풀스테이를 설립·운영하면서 인성·효행교육의 중추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

용주사-대왕의 효심
구성지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여름은 이글이글/ 그날의 슬픔을 끓어 올리듯/ 익어만 가는데,// 어느 날/ 슬픈 아비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용이 되어 훨훨/ 창공을 높이 날아올랐다// 절 곳곳에는/ 그의 효심이 역사로 남아,/ 눈물로 심었다는 배롱나무는/ 세월의 상흔처럼 백골로 남아/ 아직도 머리 위에 푸른 잎을 달고 있구나// 역사는 세월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역사를 지키는 느티나무 밑에서// 여름을 식히다 보면/ 마음은 어느덧 그 비극 속을 달린다.

어느 날 정조가 퇴락했던 고찰을 중창시켜 융릉 원찰로 삼은 화산 용주사를 찾았다. 대웅전 앞에 회양목 한 그루를 식수하고 불상을 바라보니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바로 삼라만상에 투영된 바였다. 순간, 섬광 같이 스치는 그 무엇이 정조의 생각을 두 동강 냈다.

◈마음 하나를 떨치지 못하는 내가 무슨 임금이라고!
 평상시 왕 노릇을 하는데 즐거움이 없어 홀연히 왕관을 내던지고 자유롭게 살려는 마음을 보듬고 있었다. 구중심처의 산해진미보다 초가삼간의 소찬조식을 그리워하며 허술한 미복 차림으로 민가에 나가 백성들의 삶을 두루 보살폈다. 이런 임금에게 조정 신료들은 세종대왕 이래의 성군 출현이라며 감복했다. 대덕칭송이 담긴 휘칭(아름다운 칭호)을 올리려는 중신들 간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끝내 윤허치 않고 준엄한 어명을 내렸다.
“경들은 과인을 기쁘게 하려 말고 변방 경계와 국경 수비를 간극 없이 하여 백성들의 심려나 줄이도록 하시오”
사심 없는 임금의 윤음에 조정 대신들은 물론 팔도방백들까지 크게 감동했다. 어느덧 노론, 소론, 남인, 벽파, 시파 간의 벽이 허물어지며 200년 넘게 조선사회를 짓눌러온 당쟁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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