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행복한 5월이 아쉽게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좋았던 5월이 또 있었을까?
계절의 여왕 5월. 굳이 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5월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달이다.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고, 온갖 나무에 초록물이 올라 청춘의 신록을 이룬다. 대기 역시 인간이 생활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을 제공해준다. 최고의 계절에 걸맞게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날과 스승의날도 들어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5월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행한 달이었다. 적어도 1980년 이후 한국의 5월은 피와 저항의 상징이 됐다. 어느 쪽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시민과 진보진영에겐 슬픔과 분노의 달이 됐고, 보수진영에겐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달이 됐다. 모든 국민에게 힘든 달. 심정적으로도 그랬고, 물리적으로도 그랬다. 1980~90년대 5월이면 전국 대부분의 대학 캠퍼스엔 최루가스가 들어차 눈물과 기침 없인 다닐 수 없었다. 강의실과 도서관을 폐쇄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대학가 주변 시민들은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해 친척집으로 피신해야 할 정도로 주변이 온통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시위에 나서는 때가 5월이어서 공권력과의 충돌 역시 극렬했다. 분신 투신 할복이 잇달았다. 당시 세계 언론엔 한국 시위소식이 중동 분쟁소식보다 더 센 ‘핫토픽’이었다. ‘녹화사업’이란 이름으로 강제징집 당해 원인미상으로 죽거나 정신이상에 걸린 학생도 여럿이었다. 진압하던 또래의 전경들도 죽었다. 당시 집권세력에게 ‘오월광주’는 지우고 덮어야 할 치명적 아킬레스건이었고, 젊은이들에게 ‘오월광주’는 가치관·인생관·세계관을 뒤엎을 정도로 큰 충격과 각성을 일으켰다. 그래서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걸고 나서야 할 만큼 결사적이고 치열했다. 한국의 5월은 한여름보다 뜨거웠고, 정말 많이 아팠다.
그 병든 5월에 2017년 기적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해 노래를 부르고, 5·18에 아버지 잃은 딸을 안아줬다. 따지고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행동에 광주시민은 위로를 받았고, 많은 국민이 눈물을 흘렸다. 수화통역사까지 생방송 중 눈가를 훔칠 만큼 감동적이었다. SNS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더니, 더 눈물 나게 만든다”는 행복한 푸념이 이어졌다. 상처는 그렇게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세월호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단원고 출신 학생들이 생애 첫 유권자가 돼 5월 9일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유민아빠’ 김영오 씨는 “하늘투표소에서 친구들과 깔깔대고 장난치며 투표하겠다고 줄 선 (유민이) 모습을 상상하니 아침부터 눈물이 난다”고 했다. 친구들 몫까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젊은 유권자들은 ‘진상규명’과 ‘미수습자 귀환’을 염원했다.
그리고 이에 응답하듯 친구들이 돌아오고 있다. 허다윤, 조은화 양이 여행을 떠난 지 3년 만에 엄마 아빠의 품으로 돌아왔다. 고창석 선생님도 돌아왔다. 은화 양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수습된 것으로 알려졌다.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차가운 바닷물을 맞으며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한 쪽 구석에서 애타게 엄마 아빠를 찾으며 숨져갔을 아이를 떠올리는 부모의 비통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조각 뼈와 치아로 돌아온 가족을 맞으며 기뻐할 수도, 통곡할 수도 없는 그 심정을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언제 잘릴지 몰라 가슴 졸이며, 그릇된 지시에 따질 수조차 없었던 비정규직. 같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돈을 받았고, 다른 밥을 먹어야 했던 그들에게도 희망의 소식이 전해진다.
이렇게 기적 같은 2017년의 5월이 가고 있다.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진짜 오월.
내년 오월은 조금만 더 행복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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