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건릉(健陵)-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둬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해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썼다. 정조가 재위하는 24년 3개월 19일 동안 백성들은 편안했다.
효의왕후(1753~1821)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영조 38) 세손빈에 책봉됐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지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정조의 치적
당시 당쟁구도는 영조 때와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이름조차 생소한 벽파와 시파의 등장이다. 벽파는 영조 말년까지 권력을 휘두르며 사도세자를 사지에 몰아넣은 노론파가 중심이었다.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정조와 맞섰고 시류를 무시한 수구세력들이었다. 내명부의 정순왕후, 화완옹주, 숙의 문씨와 정조의 외척들이 이에 가담했다. 반면 시파는 새 시류에 영합하는 남인. 소론과 일부 노론 이탈세력들로 조합된 신당이었다. 정조의 개혁 노선을 지지하며 벽파와 정면충돌했다.
그러나 정조는 현명한 군주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양 파를 적절히 등용해 힘을 분산시킨 뒤 왕권을 강화시켰다. 자신의 관심분야였던 문예정책을 소신껏 펼치며 백성들을 보살피니 바야흐로 태평성대였다. 규장각을 통해 양성된 동량들이 정국을 이끌며 개혁시대의 사상적 주류를 형성했고 서얼들의 등용문을 크게 넓혀 첩실, 서자들의 맺힌 한도 풀었다. 문벌과 당파주의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조정의 진출 길을 열어 조선 문화의 독자적 발전을 이루도록 했다. 이때 배출된 학자들이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수 등이다.
형정(刑政)을 개혁해 온갖 악형을 금지시키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징세법을 폐지토록 했다. 빈민구제책의 일환으로는 자휼전칙을 반포해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때 아사자를 줄였다.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이 배곯을 때나 역병이 돌 때도 내탕고를 털어 고통을 덜어줬다. 정조는 하늘이 내린 임금도 죽고 나면 초야에 묻히고 역사적 평가가 뒤따름을 선왕들의 생애를 통해 절감했다.
원래 타고난 성품이 신중·검소하고 화려함을 싫어했던 정조는 사치를 멀리했다. 옷은 항상 정결히 빨아 입었으며 조례 때 곤룡포 외에는 비단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거처하는 내전에는 횃대 몇 개와 면포요 뿐이었고 창문과 벽도 덧바르고 지냈다. 나랏일에는 부지런하고 사적인 일에는 검약했다. 백성들은 대왕의 덕을 하늘처럼 높이 칭송했다. ‘따뜻하기는 봄과 같고 유연하기는 비와 같으며 편안하기는 넓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같다’면서 금상과 동시대를 살아감을 행복해 했다.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 못지않은 정조의 왕도치세는 눈부신 문물의 전성기를 이루며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세손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활자를 개량해 임진자, 한구자, 생생자, 춘추관자 등으로 기능을 개선했다. 놀라운 인쇄술의 발달은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규장전운’, ‘오륜행실’, ‘무예도보통지’ 등의 수많은 서적 간행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호를 딴 ‘홍재전서’도 완성해 학문의 깊은 완성도를 내보였다. 그럼에도 뛰어난 정조의 ‘팔파초도’와 ‘필국화도’는 당시 필화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국문화 영향권에서 탈피해 독자적 조선 문화 현창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화풍의 진경산수 그림과 국서풍의 동국진체 글씨가 이 같은 시도였다. 일부 국수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기도 했지만 후일 서양 문명과 조우하면서 놀라운 융합 문화로 우뚝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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