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융릉(隆陵)-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 지난 호에 이어
개광해 정조 앞에 봉출된 사도세자의 유골은 참혹했다. 반풍수가 잡은 묘혈은 흉지 중의 흉지였고 광중에는 물이 차 목불인견(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차라리 내가 일찍 죽어 이 꼴을 보지 말아야 했을 것을…. 어찌 이런 험지에 28년을 계셨단 말인고! 천지신명이 무심하도다”
대왕은 경기도 화성으로 이운되는 영순(임금 시신을 운구하는 상여)을 부여잡고 날이 저물도록 통곡했다.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융릉을 지성으로 보살폈고 매년 홀로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능행해 참례했다. 한양으로 환궁하며 융릉이 멀리 보이는 고개에 행렬을 멈추게 하고 다시 한 번 아버지 묘를 바라봤다.
밝을 때 화성을 출발해 돌아갈 길이 먼데/ 지지대 고개에 이르러 늦추고 또 돌아보누나.
현재 수원의 지지대 고개명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능행 때마다 정조는 소를 잡아 인근 백성들을 배불리 먹였는데 ‘수원왕갈비’도 여기서 유래한다. 이토록 정조는 효성이 지극했고 뒤주 속에서 굶어 죽은 아버지의 한은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불행하고 비참한 사건이었다. 아버지로서 어찌 자식을 뒤주 속에 가두고 굶겨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혜경궁 홍씨는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에 당시의 피할 수 없는 여인의 숙명을 이렇게 적었다. “나 차마 그의 아내 입장에서 이 처분을 옳다고는 못하겠으나 일인즉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내가 따라 죽어서 모르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어린 세손이 있어 결행치 못하다. 다만 세자와 만난 연분을 서러워할 뿐이다”
죽은 세자나 죽인 왕이나 살아 남은 세자빈이나 세손이나 그 모두가 불행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참혹한 사건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화려한 왕릉 격으로 조영해놓고 비통하게 굶어 죽은 아버지를 못 잊어 자주 찾았다. 세자 신분의 영우원을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화산 기슭으로 천장하며 현륭원이라 고친 뒤 용주사를 크게 중창해 원찰로 삼았다.
비운의 사도세자는 이처럼 아들을 잘 둔 덕에 추존 황제 위에까지 오르지만 정작 그의 권속들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을 살았다. 혜경궁 홍씨는 81세까지 장수했으나 표독한 연하 시어머니 정순왕후의 등쌀에 오금 한번 펴지 못한 채 기구한 생을 마감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정조가 행한 친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은 깊어만 갔다. 2남(의소세자. 정조) 2녀(청연. 청선공주)를 뒀으나 장남 의소세자는 3세 때 일찍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사도세자의 마지막 모습
여보, 우리 몰래 궁을 나가서/ 거러지 부부 행세하며/ 한 세상 살아 볼까요// 구름 보고 웃고/ 시냇물 만나면 멱 감고/ 산이 있어 숨차면 쉬엄쉬엄 쉬어가다가/ 강이 있으면 발 담그고 쉬어 가면서/ 한 세상 살아 볼까요// 휘녕전 앞뜰에는/ 검은 구름이 산발한 머리를 풀어 헤치며/ 내려앉은 저녁/ 먼 곳에서는 천둥소리 울부짖는다// 불끈 솟구치는 용의 머리가/ 한 쪽으로 늘어지면서 입마구리로 흐르는/ 검붉은 피,// 뒤주 속에 갇힌 몸이 된/ 세자는/ 안간힘도 저항도 없다// 여보! 내 먼저 가니// 어린 세손 잘 부탁하오/ 이 한 마디마저도/ 뒤주 밖에는 들려지지 않았다

부질없는 시 한수로 세자의 통분을 어찌 달래 드리려만 나는 이렇게 그의 비참했던 일생을 마음 속에 그리며 시 한 수를 그의 영전에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장조(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해 정치업무를 보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됐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정헌으로 올렸고 1899년(광무 3년)에 장조로 추존됐다.
※헌경왕후(1735~1815).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 세자빈에 책봉됐다. 정조 즉위 후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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