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호학군주가 고하는 기막힌 반전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락’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갖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에 따르자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건대 의외로 정조에게는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조금만 달리면 숨이 차 다들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실록 3년(1779년) 8월 3일

정조는 문치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게 되는데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실록 16년 10월 30일에는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해 10순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중 마지막 화살은 아예 쏘지 않고 두면서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의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강단 있는 모습은 8일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1795년 윤 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나선다. 115명의 기마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6,000여 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 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으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한편 2009년 2월에 이르러서야 세간에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신하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서신에서 치밀한 전략가였던 정조의 면면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에 더해 껄껄 대며 ‘배를 잡고 웃었다’와 같은 가벼운 어투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편하게 표현한 정조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호학군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기막힌 반전이다.

◈융릉(隆陵)-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대왕이 보위에 오른지 13년 되던 1789년 8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천장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도착한 아들 정조는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전날부터 식음을 전폐한지라 이미 용안은 창백했고 서 있기 조차 힘겨워 휘청거렸다. 배종한 예조판서가 면복(冕服)(제왕이 입는 곤룡포)이 아닌 면복(緬服)(부모의 면례 때 입는 시마복)을 입은 대왕께 아뢰었다.
“전하, 군주의 예로서는 아무리 생친부(生親父)라 할지라도 면복을 입는 것이 아니옵니다”
피눈물로 범벅된 정조가 면복 자락으로 용안을 훔치며 답했다.
“지난날 과인이 최마(굵은 베옷)를 입지 못해 오늘 그때를 돌이켜 복을 입고자 하는 것이오. 지극한 슬픔을 펼치려는 것이 어찌 예(禮)에 어긋난다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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