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우리가 흔히 정조대왕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도세자, 영조, 혜경궁 홍씨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안목으로 생각해보면 그 모두가 지난하고 불운한 생을 살다간 왕조의 비극을 온몸으로 앓고 간 분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인 것이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먼저 우리는 수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수원은 역사 깊은 문화유적이 곳곳에 살아 숨 쉬는 효와 성곽의 도시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백성과 더불어 살고자 ‘수원화성’을 건설한 계획도시다.
수원은 예로부터 매홀(買忽), 수성(水城), 수주(水州)라 불린 ‘물 고을’이며 도심 중앙에 팔달산이 있고 북쪽에는 광교산, 서쪽에는 칠보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과 함께 자연 속 전통과 현대의 멋이 어우러진 세계적인 도시다.

◈북수문·화홍문(北水門, 華虹門)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해 1795년(정조 19) 1월 13일 완성됐다. 별칭이 화홍문으로 화(華)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은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북암문(北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됐다. 화성 5개의 암문 중에서 북암문은 방화수류정과 동북포루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으며 1796년(정조 20) 3월 27일 완공됐다.

◈수원 방화수류정(동북각루)-보물 제1709호(2011. 3. 3.)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됐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 화성행궁
행궁은 왕이 항상 머물며 국사를 주관하는 본궁(本宮)과 달리 전란,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행차해 임시로 거처하는 행재소(行在所)로 사용하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화산 현륭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 임금이 1804년 양위 후 장차 수원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대규모로 건설됐으며 팔달산 동쪽 기슭 수원화성의 중심부에 자리 잡았다.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옛 수원 읍치였던 화산 아래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긴 수원신읍의 관아로 건축된 후 이듬해인 1790년 5월 7일 약 340칸의 관아가 완성되면서 행궁의 역할도 아울러 지니게 됐다. 이후 1794년(정조 18) 화성성역을 시작하면서 각 건물을 증축하거나 재배치해 1976년 화성성역을 끝낼 무렵에 모두 합해 576칸의 건물이 완성됐다.
1795년 윤2월 혜경궁 회갑연의 다양한 공연예술 및 행사가 치러진 중심 무대였으며 정조와 후대의 국왕들이 능행차 때마다 머물렀던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이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정조대왕(재위 1776~1800)이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참배하기 위해 묵었던 궁으로 조선시대 행궁 중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화성행궁의 여러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병원, 군청, 경찰서 등이 들어서면서 낙남헌만 남고 모두 파괴됐다.
더욱이 1980년대 후반에 수원의료원 증축계획이 수립돼 화성행궁은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뜻 있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의료원 증축 반대 및 화성행궁 복원운동을 전개했다. 화성행궁의 복원은 1996년에 시작해 2002년 제1단계 공사를 마치고 2003년에 이르러 역사적 개관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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