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두 아이의 엄마인 입주민 A씨는 3년 전 수도권의 한 아파트로 전입했다.
그 전에 살던 지방의 450가구 아파트 단지에서, 지금 살고 있는 120가구 규모의 아담한 단지로 온 것이다. 지방과 수도권의 가격 차이 때문에 전용면적도 거의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A씨의 아이들은 이사 오자마자 크게 실망했다. 어린이놀이터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 그들이 이사왔을 때 놀이터엔 노란색 굵은 테이프가 칭칭 감긴 상태에서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끄럼틀의 철제 계단과 바닥이 심하게 부식돼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고, 목재 다리도 거의 다 썩어서 툭 치기만 해도 부러질 지경이었다. 한쪽으로 기운 시소 역시 칠이 모두 벗겨져 때와 녹물범벅이 돼 있었다.
이웃의 큰 아파트 단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단지의 놀이시설들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음에도 A씨의 아파트처럼 ‘사용금지’ 푯말이 붙어 있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어린이놀이시설 관리법’이 강화돼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시설은 예외 없이 모두 보수하거나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A씨 아이들의 실망과 낙담은 그 후에 더 커졌다. 이웃 아파트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깔끔하고 예쁜 놀이시설이 새롭게 설치돼 아이들이 더욱 즐겁고 안전하게 놀 수 있게 됐는데, A씨 아파트에선 못쓰게 된 놀이시설을 모조리 철거해 버리고, 아무런 조치 없이 모래사장만 덩그러니 남았기 때문이다.
이웃 아파트는 그동안 모아 둔 장기수선충당금을 활용해 수천 만원에 이르는 놀이시설 교체 비용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A씨의 아파트엔 그럴 돈이 없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 놀이터에서 맘껏 뛰어 놀았던 아이들은 이제 놀 곳을 잃어 결국 이웃 아파트로 ‘놀이터 원정’을 다닐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의 아파트는 공동주택관리법의 적용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큰 격차가 벌어진다. 위의 사례처럼 어린이놀이시설 교체공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극과 극의 사단도 이 때문이다.
외국의 대규모 공동주택 단지들이 오래 가지 않아 슬럼화하면서 실패작으로 끝나버린 데 반해, 우리 아파트들은 시간이 지나도 고품질을 유지하며, 오히려 가격이 상승하는 비결은 바로 이 공동주택관리법에 있다.
공동주택관리법엔 아파트 관리에 적용되는 수많은 법조문들이 있지만, 그 중 핵심은 ‘주택관리사’ 배치와 ‘장기수선계획’의 수립 및 이행에 있다.
주택관리사 제도는 공동주택 건물과 각종 시설물의 유지보수를 통해 장수명화를 유도하고, 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입주민 간 이해관계의 충돌을 중재하며, 공동체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인력을 수급하는데 목적이 있다.
또 장기수선제도는 고가의 대형 시설물들이 고장나거나 수명이 다할 때를 대비해 미리 조금씩 돈을 모아뒀다가 적절한 시기에 수선하거나 교체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제도다.
대한민국은 아파트를 잘 짓기도 하지만, 관리측면에서 이런 훌륭한 제도가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명품 주거시설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처럼 ‘의무’와 ‘비의무’로 나뉜 건 비합리적이다. 오히려 작은 단지일수록, 영세한 서민아파트일수록 더욱 세밀하고 체계적인 관리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게 입주민과 국가의 이익에 부합한다.
그래서 많은 정치인과 뜻 있는 행정가들이 모든 아파트에 공동주택관리법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실제로 서울시에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시범사업에 나선 상태다.
그런데 며칠 전 한 일간지에 엉뚱한 기사가 실렸다. 소규모 아파트에 이 법을 적용하는 게 주택관리사 밥그릇 확대로 인한 서민의 관리비용 상승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보고 있자니 늙고 병든 환자에게 “돈 없으면 병원에 가지도 말라”고 폭언을 퍼붓는 느낌이다. 서민과 주택관리사 모두에 대한 모욕이다.
복지의 기본은 뒤쳐진 사람을 돌보고 힘을 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낙오자를 도태시키는 천민자본주의의 비정함을 공동주택에서도 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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