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은 바다에 빛깔을 만들며 봄으로 온다.

제주도를 여행하려면 두모악 자락 삼달리로 먼저 발걸음을 돌려보라.

바람은 봉긋한 오름을 지나 나무며 마른 풀잎을 흔든다. 산간은 아직 서늘한 겨울이다. 흰 구름이 바다와 만나 봄이 돼온다. 섬휘파람새의 맑디맑은 울음소리. 천리향의 달콤한 향기로 봄기운 가득한 숲.
바람은 시시각각 바다의 물빛들을 바꾸며 검은 바위와 눈부시도록 하얀 모래톱의 경계에서 에메랄드빛으로 잔잔해진다. 하늘과 수평으로 맞닿은 비취빛 맑은 바다.
봉긋한 오름들을 눈으로 보다 보면 푸근한 한라산의 자락들은 비밀스럽게 다가온다. 제주의 속살 같은 비자림, 절물자연휴양림, 교래자연휴양림, 곶자왈 숲들, 오름의 억새, 백록담 남벽을 배경으로 흩뿌려진 철쭉들, 이국적인 마라도의 성당, 가파도의 청보리밭, 우도의 홍조단괴 해빈, 제주의 문화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 속의 트레킹.
여행은 느낌으로 오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 진정 제주도를 이해하고 느끼려면 먼저 삼달리로 발걸음을 돌려보자.

 

▲ 한라산 선작지왓(국가지정문화재 명승91호)의 낮은 관목류와 5월의 털진달래, 6월의 철쭉이 만개하면 산상의 화원을 이룬다.
▲ 마라도


이어도로 사라진 사람

전국을 떠돌다가 바람 타는 섬, 제주도에 정착했다. 제주의 바람에 홀려 20년동안 바람을 쫓아 다녔다. 바람 지나는 길목에서 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나무처럼 풀처럼 시련을 온몸으로 견디며 세상을, 삶을 느끼려 했다. 아니 제주도를 이해하려 했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형에게서 카메라를 선물받고 사진에 빠진 남자. 1989년 스물여덟에 제주에 들어와 2005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주도의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아냈다.

▲ 영실에서 보는 제주의 오름들

바람 부는 들판에서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며 자연이 빚어내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을 내면의 프레임으로 잡아뒀다. 불치의 루게릭병 판정을 받고 죽는 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삼달리 폐교에 2002년 ‘갤러리 두모악’을 연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안성수 전 제주대 교수는 “그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합일돼 아름다움을 창조하는가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모델이다. 언젠가 그가 이어도(離於島)로 자취를 감추는 날, 그의 예술도 대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이어도를 훔쳐본 작가>중에서 이야기한다.

제주의 20만여 장의 사진을 찍은 김영갑은 2005년에 ”내가 본 이어도“ <용눈이오름,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들> <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의 서울 나들이 연작 전시회를 끝으로 한줌의 재로 돌아가 갤러리 두모악 뜰 감나무 아래에 뿌려졌다.
갤러리를 돌아보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지만 그 여운으로 돌담을 걷거나 무인 찻집에서 입장료 대신 받은 사진엽서에 한줄 글이라도 쓰며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는 한나절을 보내도 좋을 공간이다. 제주의 바다가 왜 그리 예쁜가, 영혼의 자유로움이 무엇이며 자연이 어떻게 말을 거는지, 제주에서는 바람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바람이 어떤 빛깔들을 만드는지 이해한다면 제주의 여행은 그만큼 풍요해진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3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는 마지막 선홍빛 동백꽃이 돌담에 떨어진다.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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