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추원재
추원재는 조선 성리학의 초조인 강호 김숙자(1389~1456)가 처음 거처를 정했고 그의 아들 김종직(1431~1492)이 태어나 자라고 별세한 집이다. 이곳은 점필재의 생가뿐 아니라 그가 만년에 제자들과 토론하고 강학하던 쌍수정이 있었고 뒷산은 점필재의 묘소가 있다.
점필재 문하 중에는 많은 학자들이 있다. 그 중에 탁영 김일손은 강직하기로 유명한 사관이었으나 스승인 점필재 선생이 쓴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죽인 세조를 비난한 것이라고 문제 삼아 젊은 나이에 무오사화의 화를 입고 능지처참이라는 잔혹한 죽임을 당한다. 청도에 있는 그의 생가에는 ‘자계서원’이 그의 높은 덕과 고결한 인품을 기리며 그에 대한 제례를 올리고 있다. 여기서 탁영 김일손 선생을 기리는 시 한편을 감상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까 싶어 소개한다.

“내가 선생을 찾은 날/ 자계서원 온 뜰은/ 하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존덕사*마른 땅에/ 돗자리 깔고/ 촛불 밝히고/ 향을 사르고/ 공손히 두 번 절했다// 이곳 저곳에 즐비한/ 추모비 살펴보며/ 26세 때 선생이 지었다는/ 두류산*을 읽어본다// 너무나 짧았던 생애/ 너무나 긴 발자취 따라/ 문득 5백년 세월을 앞에 놓고/ 나는 한 올곧은 선비를 만난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기록은 고칠 수 없다며/ 운계雲溪 맑은 물에 갓끈을 씻었다// 천추에 맺힌 한이/ 사흘을 핏빛으로 흘렀다는/ 자계紫溪천을 바라보며/ 발길을 돌리는데// 오래된 은행나무 위에/ 까치 한 마리/ 원을 그리며 한참을 맴돌더니/ 창공을 높이 가른다”   
-박영수 ‘자계서원’ 전문

쪹존덕사: 탁영 선생과 그의 조부 장조카 3인을 모신 사당.
쪹두류산: 지금의 지리산
◈위양못(일명 양양지)
신라와 고려시대 이래 농사를 위해 만들어졌던 둑과 저수지다. 위양이란 양민을 위한다는 뜻으로 현재의 못은 임진왜란 이후 1634에 밀주 부사 이유달이 다시 쌓은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안동 권씨가 세운 완재정이 있고, 둑에는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들이 심어져 뛰어난 풍광을 즐길 수도 있었던 곳이다. 현재까지도 안동 권씨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 후기와 근대의 기록을 보면 못의 규모는 점차로 축소돼 왔으나 저수지라는 경제성과 연못이라는 경승지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곳이었다. 연못의 주변에는 화악산, 운주암, 퇴로못 등이 있다.
저수지 가운데에 5개의 작은 섬과 이팝나무 등 진귀한 나무들이 심어져 사시사철 아름다운 운치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선비와 문인, 학자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이다. 특히 매년 5월경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면 그 아름다운 절경이 절정을 이룬다.
이곳의 풍경이 중국 소주의 서호와 퍽이나 닮았다는 느낌이다. 다른 것은 서호에는 연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구름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고 완재정에 올라 내려다보는 맑은 물에 뜬 나무의 그림자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된다.
잠시나마 휘청거리는 육체와 흔들리는 영혼을 맑게 씻을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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