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용 칼럼

 

 

류 기 용 명예회장

입주자대표 구성원의 면면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대다수의 동대표들은 점잖고 덕망 있으며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 평소 입주민들로부터 호평(好評)을 받아온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웃 입주민들의 계속되는 권유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마지못해 나선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아예 작정을 하고 기를 쓰며 달려드는 이른바 직업적인 동대표꾼을 꼽을 수가 있겠다. 이들은 대충 자유직업을 가졌거나 또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백수(白手)로서 천성적으로 나서기를 좋아하거나 또는 남다른 동물적 후각을 지녔거나 아니면 관련업체에 종사하고 있다는 등등의 어떤 별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채 구성되기도 전인 입주 초기부터 사업주체, 위탁일 경우 위탁회사, 관리사무소 등에 얼굴 알리고 목소리 큰 것을 과시하기 위해 대표 십수년의 화려한 관록(?)을 떠벌리며 하자문제, 집기 비품 구입문제, 각종 용역 계약관계, 심지어는 등기부등본을 맡길 법률사무소 선정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이른바 ‘이권사냥’의 전주곡(前奏曲)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동대표들이 첫째, 전문지식이 미약하고 둘째, 체면치레상 별로 적극적이지도 못하며 셋째, 이웃과 등져서 좋을 게 없다는 등등의 이유로 주춤하는 사이, 꾼 한둘이 이 틈새를 교묘히 헤집고 들어와 이곳저곳 이사 다니며 갈고 닦아온 그 기막힌 노하우(?)를 풀어헤치며 절대다수의 선량한 대표들을 선동, 파벌, 작당으로 농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리만 된다면 입대의 분위기는 관리사무소 업무를 감독한다는 명분의 권위의식에 빠져 협조에서 지시로, 지시에서 명령으로, 다시 월권, 횡포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한두 사람 극소수 직업적인 동대표꾼들의 극심한 폐단은 조용하고 멀쩡하던 한 마을을 삽시간에 ‘핵실험장’으로 바꿔놓아 수습불능의 사태로까지 몰고 가게 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이 나라 공동주택에서도 보란듯이 검사필증을 교부받게 되고 그에 따르는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전체 입주민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그렇게도 순수하고 선량했던 절대다수의 동대표들이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함몰돼 가는가. 이에 대한 의문은 오래 전에 TV극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윤흥길의 소설 ‘완장’(腕章)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조용한 시골동네 저수지 낚시터의 감시원으로 위촉된 주인공은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로 ‘감독’이라 쓰여져 있고 게다가 굵고 붉은 세 가닥 가로줄까지 버젓하게 아로새겨진 어마어마(?)한 완장을 팔뚝에 차게 되면서 마냥 으스대기 시작한다. 책임이라곤 쥐뿔만큼도 따르지 않는 감시, 감독!
이 얼마나 신명나는 놀음인가. 적어도 ‘낚시터’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만큼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마음대로 행세(行勢)할 수 있고 어디 그 뿐이랴. 과거 일제 식민지 시절, 하늘을 찌를 듯한 헌병 보조원들의 생사여탈적 권위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는 터. 잠잘 때도 차마 떼어놓고 싶지 않은 그 엄청난 권력의 상징!!
어느날 버스 안에서 “그 완장에 쓰여진 감독이 도대체 뭐 하는 감독이냐”고 묻는 승객을 막무가내로 혼내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에 빠져 혼자 킥킥거리던 그 가엾은 영혼은 그렇게 시나브로 무너져 간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당시 특권의식에 찌들어 있던 성직자 그룹을 ‘만인 사제론’으로 질타하면서 “세상의 모든 질서는 이웃을 섬기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것으로서 섬김이 아닌 것은 모두가 도둑질이다”라고 하는 이른바 섬김의 윤리를 제창(提唱)한 바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이 땅의 공동주택 입주자 대표들은 자신을 뽑아준 입주민들의 여망이 감독이라는 완장차고 으스대는 본새가 아니라 관리주체의 업무집행을 받쳐주는 ‘의결기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달라는 그런 뜻이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신들의 본분과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무보수 명예직인 동대표의 본질은 ‘순수한 봉사정신’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2001년 6월 20일 수요일 제2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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