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어떤 물체의 모양을 그대로 그린 그림의 일종이 사진일 수만은 없다. 3·15의거나 부마항쟁의 사진이 촬영, 현상, 인화라는 프로세스일 수만이 있으랴.
시각을 통해 역사와 시대의 삶을 진실하게 표현하여 뜨겁게 담아두는 것이 사진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설익은 감정의 너스레나 어설픈 하소연의 넋두리가 아니다.
사진은 난해한 애매성을 거부하고, 현란한 미사여구를 허용하지 않는다. 저 아름답고 에로틱한 누드사진도 사람이면 사람냄새가 나고, 저 산야의 풀잎도 풀잎냄새가 나면 최상이다.
사진의 아버지라는 루이 다게르에 의해 발명된 사진기가 이제는 디카 시대로 발전되어 전송도 빠르기도 하다.
지금은 비주얼의 시대요, 시각 문화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다.
주남저수지에서, 우포늪에서 많은 사진작가들이 꼼짝도 안하고 철새들의 초점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을 본다. 대어를 낚기 위해 꼼짝도 안 하고 찌만 바라보고 있는 낚시꾼처럼, 기다림과 찰나의 미학을 위해서.
모든 색상과 모든 파열음을 흡수하고는 원액만이 사각의 진공에 떠도는 그 순간만을 포착하는 사진은 망상이나 집착보다는 평상심의 극치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시인이면서 사진작가다. 그의 권유로 거제의 가조대교에서 일몰을 찍는데 따라 나섰다가 추위에 많이도 떨었다.
태양이 이만치 있을 때부터 시작하여 임종을 하고 나서까지 긴 시간이다. 수백 장이 넘도록 카메라에 담았다는데 작품이 되는 게 몇 개라도 있으면 큰 수확이란다. 그 찰나를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것도 위대한 예술이 되나 보다.
250분의 1초로 찍는다는 고속사진은 그 순간포착의 스피드와 순발력의 정확도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고 했었지.
붉게 물들어가는 일몰을 차례대로 담는 건 그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간절하면서도 회피하기 어려운 내면의 스토리가 있는 자기표현의 창작이다.
성포항으로 입항하는 빈 배, 하늘의 모서리를 나는 허기진 저녁 갈매기, 빈 곳간처럼 웅크리고 있는 작은 섬. 그러나 사진은 빈 배이거나 허기진 저녁 갈매기거나 작은 섬이거나 동정심을 유발하지 않는다. 대상에 청풍을 입히고 비단을 걸치지 않는다. 이익을 표준으로 하면 소인이요, 정의를 표준으로 하면 군자라 했던가.
사진은 열악한 처지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포퓰리즘이 아니요, 선동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걸러내고 압축되고 생략된 초점을 향해 기다림 끝에 찰나의 진수를 입력시키는 승부의 미학이다.
기다림과 찰나의 만남, 이것이 영원을 향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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