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천황산 표충사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밀양 재약산(1,189m) 기슭에 자리하는 표충사는 유생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제사 지내는 표충서원이 사찰 영역 안에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특색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창건해 죽림사라 한 것을 신라 흥덕왕 때부터 영정사라 했고 1839년(헌종 5)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 사명,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당을 이곳으로 이건하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가 됐다. 표충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보우국사(889),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1286), 천희국사(1290)가 선풍을 관장해 일국의 명찰이 됐다. 예로부터 명산유곡으로 이름이 높았던 표충사 일대에는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남긴 각종 전설들이 전해져 온다. 여기서 잠시 효봉대사를 읊은 시 한편을 감상하기로 하자.
서른여섯 살 중년이/ 엿판을 맨 채 금강산을 오른다// 어제는 검은 법복을 입고/ 죄수에게 무거운 선고를 내렸지만/ 오늘은 속세의 연을 끊고/ 엿장수가 되었다// 유점사 휘돌아/ 신계사 보운암/ 금강도인 석두화상 앞에서/ 엿판을 내리치니/ 문이 막혀 대답이 없던/ 토굴이 무너져 내리네// 어제는/ 한국인 최초의 법관이/ 오늘은 대선사로,// 어제까지 그가 말한 법문은/ 이승에서는 군더더기,// 오늘은/ 구름 따라 물 따라/ 세월로 흐르니/ 효봉쪹의 멎은 염주만/ 무자로 남아도네.
-박영수 ‘무無자로 남아’ 전문
*속명이 이찬형인 효봉 큰스님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배워 1913년 일제강점기 첫 조선인 판사가 됐다. 그가 선고한 사형이 집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범이 잡혔다. 그는 법복 대신 누더기를 입고 엿장수로 3년을 떠돈 끝에 1925년 불가에 귀의했다.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기본적인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같은 단층 기단의 삼층석탑이다.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77년(숙종 3년)에 작성된 ‘영정사고적기’에 신라 흥덕왕 4년(829)에 인도의 황면선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와 탑을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1998년 탑을 해체 복원하는 가운데 금동불상 39점과 명문지석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표충사 호국박물관에 소장 전시하고 있다.
◈표충사 호국박물관
표충사에서 전래해 오던 유물들과 사명대사의 유품들을 수집·전시 해 놓고 있다. 소장 유물의 대다수가 사명대사의 유품들로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은 국보 제75호 표충사 청동은사향완으로 고려시대 향로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이다. 향로 표면에는 도문을 음각하고 그 음각한 홈 속에 은사를 넣어 장식하는 은상감의 기법을 사용했다.
사명대사의 유품으로는 국가 중요 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된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 목탁, 108염주, 구 염주, 교지, 발우, 불자, 시저, 은찻잔, 옥제등잔, 호신용 칼(선조 하사)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밖에 표충사에서 간행한 사명대사 관련 문집 책판류와 함께 영정사 직인, 목제 인통, 표충사 관련 고문서, 임진왜란 공신록권, 일산, 임진왜란 포로 송환 문서, 표충사 삼층석탑 발굴 금동불상, 사명대사 일본상륙 행렬도 등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사명대사의 시 문답
강화회담을 위해 파견할 적임자로 선정된 사명 스님은 국왕(선조)의 친서를 휴대하고 1604년(선조 37) 8월 대마도에 도착했고 12월에는 일본 본토에 들어가 당시의 실력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를 만나 강화를 맺으며 시 문답을 나눴다.
“돌 위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방안에는 구름일기 어렵다./ 너는 어느 산의 새이기에 봉황이 노는데 왔느냐” -도쿠가와 이에야스
“나는 본디 청산학이어서 항상 오색구름 위에 놀았는데 하루아침에 운무가 사라져서 꿩들이 노는데 잘못 떨어졌다. -사명대사
대사는 이처럼 오연하게 응수하며 당대의 실력자의 의중을 간파하며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줬다. 사명당은 많은 시와 기행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 있으며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에 대한 하나의 정신적 지주가 아닐 수 없는 둘도 없는 위대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