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용 칼럼

 

 

류 기 용 명예회장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국경조차도 빛을 바래가던 21세기 초 밀레니엄의 새로운 미래는 경제의 성패에 달렸다며 애써 IMF시름을 떨쳐버리고 싶었던 우리 모두는 기업들의 분식(扮飾)회계와 거품 포장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어느 통 큰 기업가는 잠수함으로 긴 여행을 떠났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왕회장마저도 밑 빠진 독을 남겨둔 채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건국 이후 우리 경제는 끝없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매점매석 등 사도(邪道)의 횡행으로 몸살을 앓아오던 터에 경제의 신철학을 주창하고 나선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1800년대 초 상인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밑바닥에서 천대받던 시절, 평북 의주 출신의 ‘임상옥’은 장사는 곧 사람(商卽人)이라는 인본 철학을 바탕으로 “장사는 이(利)를 남기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의(義)를 이루는 것이라야 한다”는 이른바 상업지도(商業之道)를 실천해 19세기 조선 최고의 거상으로 우뚝 섰으며 죽기 직전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이라는 유언을 남긴다.
한편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역사상 가장 흉포한 도둑으로 꼽았던 도척(盜拓)은 “도둑에게도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도, 즉 도도(盜道)가 있다. 첫째, 집안에 숨긴 보물을 밖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을 성(聖)이라 하고 둘째, 선두에 서서 들어가는 것을 용(勇)이라 하며 셋째,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 다음, 일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지(知)라 하고 마지막으로 훔친 물건을 사심 없이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이 대목에서 도가의 맹주 격인 장자는 도척을 성인(聖人)이라 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의 물건을 훔쳐 먹고 사는 도둑에게도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거늘….
올해 초- 아파트 관리비에 대한 부가세 문제가 불거지자 위탁회사들이 관리권 수주영업을 중단하는 바람에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일부지역에서는 부가세 반대 서명운동이 신통치 않게 되자 지하철 노선연장이니 혐오시설 반대운동이니 하는 돌려차기로 서명 받아내는 해프닝까지 있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특정단체, 특정 인물들이 입주민의 관리비 부담을 가중시키려 한다”고 호도하는 작태 앞에서는 위탁회사의 본질, 그 존재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탁회사가 상법상의 상인이라면 주택관리사는 공법상의 공인이다. 위탁회사가 자치, 위탁 간의 취사선택이라면 주택관리사는 의무배치라는 법정 규범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위탁관리의 행태는 과연 어떠한가.
고작 단지 하나 알선하면서 전무권한(全無權限) 무한책임(無限責任)뿐인 근로약정서, 서약서, 각서 따위 이른바 현대판 노비문서나 챙기는 것이 위탁관리, 전문관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도대체 위탁관리권 재수주 여부에 의해 국가공인 전문관리 자격사의 생존 여부가 좌지우지되는 이 정신 나간 세월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지난날 위탁회사에서 배운 점도 있고 도움도 받았으며 주택관리사제도 시행 이전에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었던 것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달라져야만 한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야기가 있다. 희랍(아티카)의 대도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람들을 잡아다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키가 침대 길이보다 길면 긴만큼 잘라내고 짧으면 침대 길이에 맞을 때까지 늘려서 죽여 버렸다.
지난 세월, 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인 채 노예, 하루살이, 머슴, 소모품, 애완동물 등을 수없이 뇌까리며 쓰러져간 그 처절했던 원성은 지금도 이 땅 굽이굽이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따라서 위탁회사들은 이제라도 그 상처받은 영혼들 앞에 깊이 사죄하고 진정으로 입주민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뇌하면서 환골탈태의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손바닥으로는 결코 하늘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류기용의 아파트세상blog.daum.net/ykypen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