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폼페이 최후의 날이 다가와도 입맞춤에 몰입한 젊은이가 있었으니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능력껏, 주어진 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자기 확대를 꿈꾸며 나아가는 것, 그 확대가 때로는 소멸이란 이름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모든 것은 다가온다. 종류가 다르고 선택이 다를 뿐이다. ‘다가온다’는 단어를 붙잡고 운동하러 나갔다.    
걷는 운동을 하는 동안 저녁메뉴로 코다리찜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한살림 매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는 친환경운동 차원으로 비닐봉투를 주지 않는다. 나는 장가방을 가지고 나가 장을 보는 날보다 그냥 장을 보아오는 날이 더 많다. 내게 따뜻한 손길이 다가온 날도 코다리가 강원도에서 배달되는 것을 확인하고 운동하러 나간 날이다.   
매장에 들러 콩나물 두 봉지와 연근 두 봉지를 샀는데 들기가 옹색했다. 봉지 네 개에 구멍을 뚫어 비닐 끈을 통과해 넉넉하게 길이를 잡고 양끝을 묶어 가운데를 들면 손잡이가 되고 양쪽으로  무게의 균형이 잡힐 것이란 짐작으로 꾸리기 작업을 시작했다. 계산대 옆에서 봉투에 구멍을 내는 나를  보던 직원이 뭐하느냐고 묻는다.
이러저러하게 만들어 들고 갈 거라고 말하자 직원들 모두가 웃는다. 시골장에서 고등어 한 손 사서 달랑거리고 걷는게 연상되는가 보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더니 곱게 접어둔 비닐 봉투를 하나 꺼내주고 또 웃는다. 내가 만든 완성품을 봤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나도 덩달아 마음껏 웃었다. 손님이 적은 매장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줄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주어진 물자를 가지고 내 아이디어대로 들고 갈 재주를 부리는데 봉투는 자연스럽게 내게 왔다.
돌아보니 내 인생은 이렇게 바라지 않고 내 방식대로 묵묵히 풀어가다가 타인의 손길이 닿아서 길이 난 것 투성이다. 세상은 곳곳에 행운의 손이 대기 중이라는 것을 살면서 수도 없이 겪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남이 길을 내주면 나는 묵묵히 걸으면 됐다. 오다가 약국에 들렀더니 모시 송편 한 봉지를 준다. 이번에는 비닐봉투의 남은 공간이 넉넉하니 담아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약국 문을 열고 나오다가 보니 어느새 거리에는 땅거미가 지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다. 겨울이라 가로등 불조차도 온기로 더 한다. 아직은 어둠이 약해 빛이 강렬하지 않지만 나는 가로등 앞을 지나며 환하게 또 웃었다. 한살림 매장에 웃음꽃을 피워놓고 나왔더니 내 가슴도 꽃밭이다.  
복은 언제나 내게 올려고 대기 중인데 내가 그 복을 어떻게 불러들이는가가 관건이다. 다 완성됐더라면 더 많이 웃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 나는 한마디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주지 않고는 못 견디겠느냐고 물을 걸 그랬다. 나의 창작 행위를 망쳤다고 그럴걸 그랬다.
난 사는 게 특별히 불편하지 않다. 이거 아니면 저것으로도 충분하다. 문제 앞에 서면 어떻게든 묘수가 생긴다. 나로서는 시골장이 생각나서 정감 있는 풍경이었는데 멋쟁이가 드글거리는 청담동 한복판에서 그러한 모양새로 그 봉지를 흔들거리며 들고 가는 어떤 할매를 본다면 아마 일간지 사진기자가 들러붙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저 우리집 근처일 뿐인데…운동하러 나왔다가 샀을 뿐인데…보는 사람이 딱하게 봤던 것 같다.
내가 획득한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내게서 봤으므로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일상의 이런 나를 보고  ‘녹슬지 않는 비밀창고’라고 표현해준 여인이 있어 사는 게 즐겁다. 
무엇인가 도와주기를 바라다가는 되레 망하고, 들키면 더 속 보이고, 그저 내 실력껏 투덜거리지 않고 세상살기에 길들였더니 웃을 일도 생긴다.
언제나 이미 행한 일은 흘러간 물이려니 생각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보면 뜬금없이 희소식이 돼 돌아오기도 하고, 까마득히 잊은 듯한 사건이 새끼를 쳐서 복돼지 가족처럼 디룩디룩 몸피가 불어나 달려 들기도 한다.
인생의 매뉴얼이 정해졌으면 그 다음에는 묵묵히 게으름피우지 않고 살아가는게 최우선이라는 생각이다. 자기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보이는 정도로 인생을 가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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