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아랑각
명종(1545~1567)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전설의 주인공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아랑은 당시 밀양부사의 딸로 성은 윤씨, 이름은 동옥 혹은 정옥이다. 어느 날 유모를 따라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괴한(주기라고도 함)의 핍박을 받자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 한다. 그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해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정순아랑지비貞純阿娘之碑’라는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아랑각이라 불렀다. 지금의 아랑사는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맞배지붕의 3칸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중창한 것이다. 사당 안에는 아랑의 영정과 위판을 봉안했다.
매년 밀양아리랑대축제 행사를 통해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이 돼 이곳 아랑각에서 음력 4월 16일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밀양문화재 행사가 매년 가을에 개최돼 왔는데 1963년 2월에 착공한 아랑사당 중건공사가 완공돼 제9회 밀양문화재 행사 기간 중에 준공식을 함께 개최하기로 하고 이때 육영수 여사의 청으로 아랑 영정을 함께 봉안하기로 했다.
10월 9일 밀양군청 광장에서 개최된 봉안식에서는 육영수 여사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역대 최대 규모의 문화재 행사로 개최됐다고 한다.

◈아랑 유지비
아랑사 서편 죽림 속에 석비가 있는데 비의 전면에 ‘아랑유지’라는 글자가, 후면에는 ‘융희 사년 오월일(1910) 이응덕 희립’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들 인물은 당시 공조로서 은퇴한 고을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비를 세운 지점은 아랑의 시신이 유기된 장소로 전해져 오고 있다. 비석 위에는 동전 머리핀 브로치까지 놓여 있었다. 물론 아랑의 원혼을 위로하는 마음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복(복을 비는 마음) 현상은 유별나다. 어릴 때 할머니의 비는 모습을 수없이 보면서 자란 나는 그 마음을 잘 알 것도 같다. 차제에 나도 덩달아 동전 몇 닢을 제물 올리듯 공손하게 올려놓고 하직했다. 편이 잠드시라. 아랑낭자여!

◈작곡가 박시춘 선생 옛집
한국 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 선생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년시절부터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여러 악기를 연주하다가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어둠에 피는 꽃’으로 작곡가로 데뷔했으며 1935년 ‘희망의 노래’에 이어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며 인기 작곡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후 작곡가 박시춘 선생은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럭키 서울’ 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총 3,000여 곡을 작곡해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서민생활의 애환을 달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전우여 잘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국민 애창곡을 작곡해 ‘한국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 ‘혈서지원’ 4곡으로 인해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사로 거명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가요 1세대로서 뛰어난 기타 연주자인 선생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선율이 특징이며 1961년 한국연예인협회 초대이사장을 맡았고 1982에는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았다.
2001년 5월 밀양시에서는 선생의 음악세계를 높이 기리기 위해 이곳에 선생의 옛집을 복원했다. 이곳에는 그의 곡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가 서 있다.
나는 지금도 선생의 곡을 좋아해 산책할 때 자주 듣곤 하는데 감정이 풍부한 그 선율에 매료돼 내가 시를 쓰는데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중 선생의 생가를 답사하게 돼 감개가 무량함을 굳이 숨기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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