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시간은 충분했다.
비행기처럼 공중폭발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탈출할 틈 없이 한 순간에 불이 붙어버린 관광버스도 아니었다. 정지한 배는 한 동안 옆으로 누워 있다가 서서히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국가시스템이 조금만 작동했어도 절반은 살릴 수 있었고, 모두가 정상적으로 기민하게 대응다면 대부분의 승객을 별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날 오전엔 뭘 했는지 밝히지도 못하는 대통령은 오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머리를 매만졌고, 더 늦은 시간에서야 상황실에 나타났고, 그렇게 피 말리는 시간을 허송하는 동안, 배 끝머리만 가까스로 물 위에 보일 때까지 국가시스템은 불능상태가 됐다.
청와대의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대통령에게 사태의 위중함을 깨우쳐주지 못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국가가 구하러 달려올 거라 굳게 믿고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켰던 아이들은 그 헛된 믿음 때문에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머지 국민은 그날, 그 시간, 그 배에 타고 있지 않았기에 살아 있을 뿐, 언제든지 아주 사소한 사고로도 죽을 수 있는 나라에서 요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이런 정부아래선 살아 있는 게 ‘천운’이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 순간을 살고 있다.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2016년을 매우 비중 있고 중요하게 기록할 것이다.
국가의 명운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지만, 내 가족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국민들은 이제 모든 걸 걸고 싸움에 나섰다.
유사 이래 최대 인파가 광장으로 뛰쳐나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서울과 지방의 여러 아파트 입주민들이 발코니 밖에 현수막을 내거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아파트 입주민들이 도탄에 빠진 나라 걱정에 의욕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관리종사자들이 관리에 대한 마음을 다잡고 허술함이 없도록 꼼꼼히 챙겨야 한다.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를 쓴 찰스페로는 원자력발전소나 화학공장, 비행기, 배 등 거대한 시스템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요소들 가운데 몇 개가 오작동하거나 실수를 하면 엄청난 재앙이 터진다고 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공동주택 관리의 핵심단체인 대한주택관리사협회가 지난 8일 정기총회를 열고 혼돈에 빠진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주택관리사들이 흔들림 없이 정진할 것임을 다짐했다. <관련기사 1, 3면>
이날 총회는 선거가 없고, 이슈가 될 만한 것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참석률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참석대상인 전체 대의원 400명 가운데 344명이 참석해 86%라는 놀라운 참석률을 기록했다. 분위기 또한 뜨거운 관심 속에 시종일관 진지함과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총회 때면 늘 나타나는 고함과 야유가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발언권을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쏟아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총회 참석자들은 국가적 혼란 속에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호시우행(虎視牛步)할 것을 다짐했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은 대의원들과 치밀하게 준비한 운영진의 모습만으로도 주택관리사들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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