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바다가 키워낸 4남매는 어쩌면 보석 같은 어머니의 전리품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어장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평생을 함께 울고 웃고 한 ‘청일호’도 폐선이 되었다고 한다.
질곡의 세월 속에 시련의 연속이 인생이다.
제각각 숨 막히는 인간극장이 있어 고통이나 행복의 우열을 가린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죄가 없어도 모진 놈 옆에 있다가 같이 벼락을 맞는 일도 있질 않더냐.
나만의 어떤 그 무엇이라는 삶이 대단할 것도 없다. 도공이 가마 앞을 못 떠나고, 농부가 논밭을 못 떠나고, 어부가 바다를 못 떠나는 게 말이다. 다만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바다 은퇴식을 하고는 대학교의 평생교육원에서 시와 수필 창작 공부를 하고 등단을 하여 시집도 내고 수필집도 내었다는 게 예사롭지가 않아 거론을 해보는 것이다.
복제와 가상현실, 로봇과 알파고가 판을 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일흔이 넘어서도 고루한 문자를 찾고 진부한 기호를 찾아 더불어 살아간다는 바다를 닮은 어머니.
자고 나면 신조어가 생기고 이상한 이모티콘이 범람해 이해하기 힘들어도, 결코 세상에 들러리가 될 수 없다고 한 뜸 한 뜸 수를 놓듯 써내려가는 그의 글은 아포리즘이다.
가식과 기교도 모르고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도 모르지만 시는 거창한 게 아니라 생활이라 하질 않던가.
학문으로서의 시와 시인으로서의 시는 다르다고도 하질 않던가.
욕망과 밀약을 하고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시대에, 현란한 미사여구를 배척한 채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다는 어머니. 어머니도 윤동주의 시처럼 항상 이렇게 물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들이 없느냐고,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물러서야 행복일 때도 있질 않다던가.
어부는 절대로 낚시줄을 일방적으로 당기지 않는다. 당기고 풀어주고, 풀어주고 당기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진동 바다의 솔섬도 알고, 하트섬도 알고, 그 옛날 커다란 상어를 잡은 걸 동진교도 알지만, 바다와 은퇴식을 하고 이만큼 서서 바라보는 저 진동의 광암 바다는, 상처의 나이테거나 그늘의 지친 경계가 아니라며 파도가 은빛 이랑을 내며 철썩인다.
상처 많은 나무가 무늬가 곱다 했던가.
수천 년을 이어온 진동바다의 물결이 상처가 많아 저리도 고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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