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 엄흥도 정여각. 영조 2년에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하늘도 천지신명도 어쩔 도리가 없을 때가 있다. 실낱 같던 단종의 명을 재촉한 건 경북 순흥 땅에 귀양가 있던 여섯째 숙부 금성대군이 이보흠과 계획한 또 다른 복위운동의 발각이었다. 세조는 아예 후환을 없애겠다며 의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지어 내려보냈다. 이리해 단종은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니 보령 17세. 왕방연은 단종의 사형을 집행하고 돌아오며 피를 토할 것 같은 슬픔에 잠겼다. 어쨌든 자신이 가져간 사약으로 인해 어린 임금이 생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가.
그후 왕방연은 서울에 와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인 경기도 구리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마쳤다. 단종이 승하한 10월 24일이면 배를 한바구니씩 상에 올리고 제사를 올렸다. 어린 임금을 유배지로 호송하며 어명이 무서워 물 한 모금 못 올린 한 때문이었다. 유난히 달고 물이 많아 이 지역에서 나는 배를 ‘먹골배’라 부르게 된 연유다.
세조는 단종을 죽여 동강에 던져 버리고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했다. 이토록 서슬 퍼런 시국에도 의인 하나가 있었으니 영월 호장(향리직의 우두머리) 엄흥도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면서 물 위에 떠 있는 시신을 수습해 영월 동을지산에 암장했다. 그리고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던 자리만 녹자 그 자리를 파고 묻었다. 풍수인들은 이 자리를 조선의 왕릉 가운데 태조 건원릉, 세종 영릉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꼽고 있다.
단종은 240여 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에야 비로소 복위돼 시호를 받고 영년전에 부묘됐다. 숙종 때 대제학 서종태가 장릉을 복원하며 정자각 상량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구불거리는 산세는 멀리 그 줄기가 갈라졌고 봉황이 나르며 용이 오르는 기상을 머금었다. 뭇 산이 둘러쳐 옹위함이 임금께 절하는 듯하다”
현재 장릉 앞에는 사릉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 정령송이 쓸쓸히 서 있다. 이곳에 참배를 하다보면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 있다. 묘소를 병정처럼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들이 한결 같이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엄숙하다 못해 처절한 느낌마저 든다. 단종애사를 그 누가 모르랴마는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도륙됐지만 그로 인해 사육신도 생육신도 있는 것이고 보면 그래도 소년왕은 편히 잠들지 않았을까 하는 억지 생각도 해본다. 권력과 부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며 그래도 충성으로 일생을 산 사람들은 청사에 기리 빛나게 된다는 것 또한 실감하게 될 것이다.

소년왕 단종의 마지막 모습

그해 스무나흘 초겨울/ 태양은 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하늘도 젖빛으로 젖어 있었다// 우두둑 우두둑/ 빗방울 떨어지고/ 갑자기 한 낮이 어두워졌다// 아궁이에 타다닥/ 장작불 타오르고/ 소년의 맑은 눈빛엔 이미/ 사욕도 번민도 미련조차 없었다// 별안간/ 우르릉 쾅쾅, 천둥이/ 죄인들의 고막을 찢었다// 삿자리 깔린 더운 방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말씀은/ 어머니도 아닌 아, 송비宋妃*여!// 얼마나, 그리웠을까/ 가슴이 아팠을까/ 도대체 정이 무엇이길래//
학 한 마리/ 노송 상상봉도 아닌/ 적소謫所 용마루에 날아와/ 날갯짓으로 호곡을 한다// 차라리, 숨겨 두어라/ 소년왕의 마지막 모습은/ 긴 침묵이고 정적일 뿐// 동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말없이 흐르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동지을산* 기슭을/ 곤룡포 곱게 차려 입은/ 소년왕 단종이// 짤랑짤랑 말방울 울리며/ 유유히 흘러가고 있구나/ 태백산*을 향해

*송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동지을산: 단종왕의 능인 장릉이 있는 산
*태백산: 단종대왕은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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