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첩첩산중, 오지에 부부가 집을 짓고 산다. 자영업을 하던 남편이 병을 얻어 살아보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숲으로 들어갔다. 뭐든 사는 게 불편해 먹을 만큼 채소를 가꾸고,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와 버섯을 채취해 갈무리하고, 닭을 키우며 달걀을 얻어낸다. 그것으로 부족해 젖을 얻기 위해 염소를 키우는데 새끼를 치는 바람에 자그마치 40여 마리로 늘었다.
그 염소 중 대장 염소는 이제 늙어서 씨받이를 하지 못하고 풀을 뜯으러 나가지도 못한다. 염소는 울 안에서 자꾸 저지레를 한다. 마른 풀을 다리에 둘둘 감기도 하고 벽을 차고 물어 뜯으며 성질을 내기도 한다. 그래도  주인은 장에 내다 팔지 않고 울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는다. 보기 불편해도 사는 날까지 데리고 살다가 땅으로 보내겠다며 대장염소의 노후를 지킨다. 
나는 염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내 안에 저장된 이미지 하나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검고 몸집이 큰 뿔소 머리 위에 하얀 새가 날아와 앉더니 하얀 물똥을 쌀 때, 뿔소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지.’
그 이미지를 보는 순간, 즉각 투사가 일어나고 그 까만 뿔소가 내 어머니로, 하얀 새가 나로 보인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머니는 지금 89세 나이의 크기일 뿐 아무 힘이 없다. 기억 안에서 검게 자란 이미지일 뿐이다.
나라님도 비운에 부모를 잃고 나더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트라우마가 형성되면서 남과 다른 선택을 하는 성격적 코드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일생동안 살아내면서 느닷없는 일을 겪고 나면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남과 다른 선택을 하는 성향으로 변하게 된다. 다시는 아프고 싶지 않고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아서 지나친 방어를 하거나 자기 나름의 생존 전략을 가지게 된다. 작게는 고집이 세다거나 말수를 줄여버린다거나 남의 탓으로 일관하는 버릇이 붙는다거나 마음을 닫고 살아버리기도 한다.
세월이 한참 가고 나면 남과 다른 자신을 보면서 왜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까를 한번쯤 질문하고 자신에게서 답을 구하면서 가야만 하는데, 길이 들면 본인은 견디는 힘이 붙어서 자연스럽게 살아낸다.
자연스럽게 끊어진 인연이 아니면 불안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인간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다. 공인으로서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불편을 겪게 되고 바꿀 의지를 세우지 않는 한, 편법의 인연이 포진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내적 언어를 들어주지 않아서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기와 낯선 자기로 살아간다. 
그 하얀 새는 날개를 달고 어디론가 날고 싶어했는데 사람은 잠시 자유를 누릴지라도 땅에 발을 딛고 살아있는 한 사람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자각증세가 나타났다. 검은 뿔소보다 월등히 몸집이 작고 나이가 들어 뿔이 뒤틀린 염소가 내 어머니 이미지로 보였고 나는 그 어머니를 땅에 묻을 때까지 그 자연인처럼 보아 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에 갇혀 일상을 원만히 살지 못하고 날라다 주는 풀을 먹고 사는 대장 염소, 검은 털은 여전한데 두 개의 뿔은 몰골사납게 뒤틀어졌다. 공격용으로도 쓸모가 없고 대장의 위엄도 사라졌다. 다만 명줄이 남아있을 뿐이다.
자연인은 대장염소를 어려울 때 함께 한 식구로 인정하고 노후를 챙긴다. 염소 식구를 늘려준 업적과 노고를 알면서 장에 내다 팔 수는 없다고 한다.
염소 주인은 뿔이 뒤틀린 염소에게서 자기 투사가 일어나고 나는 염소주인에게서 투사가 일어난다.
‘귀신도 부릴 나이, 70이 눈 앞인데, 뿔에 받힌 기억이 귀신처럼 마음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통에 ’대장염소‘ 근처에도 가기 싫어 내가 날개를 폈지. 그런데 저 대장염소 주인이 날더러 새가 아니라네. 늙은 내 어머니에게 가야 한다고 말없이 나무라네. 다음 주에 갈텐데, 나는 염소 주인처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 대장 염소의 편안치 못한 모습을 대면하기가 두렵다. 귀신도 부릴 나이가 눈 앞인데, 눈 앞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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