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원초아’라는 이드는 개인의 무의식 속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본능과 충동의 저장고라고 한다. 이드가 멈춘다는 것은 죽은 목숨이다. 사랑의 기원은 섹스요,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함께라는 관계로 나뒹구는 섹스는 신이 내린 은총이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기적이며 그 어떤 것들도 스토리는 아름다운 사랑이다.  
마음이 살아 있다는 성(性)을 접두어로 하여 성도 문화라고 하는 요란한 오늘이다. 명예퇴직도 없고 정년퇴직도 없다는 그 위대한 성 앞에 서면 위대한 정치가도, 위대한 예술가도, 위대한 성직자도, 위대한 선생님도, 위대한 사업가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 스캔들이 많은 걸 시비하지 마라.
구치소가 있고 교도소가 있고 중앙분리대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리.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성욕은 아무리 위인일지라도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한다고 했나 보다.
간통죄도 사라진 그 아름다운 성을 두고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성폭력이니 성매매니 하는 불미스러운 언어를 남발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내면의 목소리라는 양심이나 도덕이라는 초자아도, 합리적인 의식의 세계라는 자아도, 강렬한 리비도 앞에서는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멀기만 한가 보다.
인류 최초의 직업이 성매매였다고 하니 인류의 마지막 직업도 성매매가 아닐까.
어쨌거나 축제장에 음담패설의 품바가 빠지면 왠지 허전하기까지 한 것은 웃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자가 붙는 직업의 5대 반열에 나란히 하는 것이 엿장사라는 품바란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엿 장사.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놈은 구경은 실컷 하고 엿 팔 때쯤이면 슬슬 뒷걸음치는 놈이라고 품바가 강력히 주장한다. 
속세를 뒹굴며 웃음 주는 품바.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감정에 나의 감정을 첨가하고 확대시키면 시가 된다고 하질 않던가. 품바에 나의 감정을 실으니 심장이 살아나는 불쏘시개가 된다. 지렛대가 된다.
법정은 말한다.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사실 우리가 한꺼풀 가면을 벗어버리면 품바가 아닌가.
풍파에 찌들고 세속에 물들어 무디어진 감정들이 품바를 보면서 우리의 성을 일깨우고 생기를 찾게 한다.
여름은 뜨거운 갈망의 계절이지만 서서 오줌 누는 남자 화장실에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라는 슬픈 문구가 있다.
회산 백련지에 전국 각설이 품바경연대회의 열기는 높아만 가고, 어차피 우리는 등수와는 관계가 없어 숙소를 예약해놓은 목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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