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갑옷 갑(甲)’, ‘새 을(乙)’. 우리 생활에 많이 쓰이는 단순하고 쉬운 한자다.
이 말이 친숙해진 이유는 음양오행 이론에 바탕한 천간십간(天干十干) 열개의 글자 중 두 글자가 가장 먼저 나오기 때문이다. 10간과 12지지가 결합해 60갑자를 이루는데, 이는 농사에 중요한 24절기와 함께 달력의 모든 칸을 채운다.
갑남을녀(甲男乙女)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뜻하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은 ‘서로 논란하고 반박하며 의견을 주장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친근한 말은 계약서에도 등장한다. ‘갑’은 일을 시키거나 물건을 사는 쪽(돈을 주는 쪽), ‘을’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상품을 판매하는 쪽(돈을 받는 쪽)을 칭한다. 그러다보니 평등하게 사이 좋았던 ‘갑’과 ‘을’에게 뜻하지 않은 신분과 계급이 주어지게 됐다.
갑이 시나브로 ‘권력’이 된 것이다. 권력자 ‘갑’ 옆에 ‘도구를 가지고 하는 일’ 또는 ‘신체 부위를 활용한 어떤 행위’를 뜻하는 ‘질’이 붙어서 ‘갑질’이란 신조어도 탄생했다.
백화점 판매직원이 손님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무릎 꿇고 사과하는가하면, 주차장 아르바이트생도 사소한 이유로 바닥에 꿇고 잘못을 빈다. 대기업 회장들의 기사 폭행은 너무 흔해서 뉴스 축에 끼지도 못하고, 땅콩을 접시에 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백 명이 탄 비행기를 돌릴 정도의 ‘울트라갑질’은 돼야 언론의 환대를 받는다.
하물며 국무총리는 KTX를 타기 위해 시민들을 제지해가며 관용차량을 탄 채 서울역 플랫폼까지 들어갔으니 갑질문화는 우리의 뇌리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공동주택도 갑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먹던 빵을 던져주는 입주민에 항의해 분신자살을 하고, 불합리한 공사를 강행하려는 입주자대표를 막아서는 관리사무소장에게 “종놈이 감히”라고 다그친다. 방문증도 끊지 않은 외부 차량의 불법주차에 스티커를 붙이면 득달같이 달려와 “흠집나지 않게 떼어내고 손님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입주민은 부지기수다.
국민들은 이따금씩 방송에 등장하는 뉴스를 접해야만 적나라한 실상을 접할 수 있지만, 소장부터 기사와 경리, 경비원과 미화원에게 가해지는 폭언과 폭력, 추행과 부당노동행위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 행위는 주로 관리사무소나 경비실 같은 폐쇄된 공간이거나 인적이 없는 심야시간대에 벌어지기 때문에, 같은 아파트 입주민이라도 까맣게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피해 당사자는 법적 대응은 커녕 공론화되는 것조차 부담스럽기만 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여기에 더해 직원들이 당하는 폭력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관리직원의 고용불안과 신분 불안정은 비리와 부패를 만연시키는 주범이다. 늘 해고의 공포에 직면해 있는 관리사무소장과 직원들은 주민대표나 일부주민의 잘못된 행동을 목격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불의를 지나치지 못해 정의감을 잘못 발현했다간 온 가족의 생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곤궁한 상황 속 작은 비리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은 큰 비리에 대한 ‘동조자’가 되고, 그러다가 더 큰 부패에 함께 올라타는 ‘동지애’로 변질될 수도 있다.
윤관석 의원이 정당한 사유 없이 관리사무소장을 해임할 수 없도록 하는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관련기사 1면)
두 손 들어 환영한다. 누구의 입장도 아닌 아파트 입주민의 입장에서.
소신과 양심이 바로 설 수 있어야 아파트가 평온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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