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석사 산문에서

 

절집 기와 추녀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산사의 풍경소리 들리다.

기억을 잡아 두는 풍경들

배롱나무는 서산 개심사와 울진 불영사 연못을 붉게 물들이고도 화사하지 않는 비구니 스님의 옷깃마냥 꽃이 핀다.
고창 선운사 대웅전 앞 배롱나무 고운 가지에는 도솔암을 따라 꽃무릇 붉게 피는 가을까지 한 여름을 지나도 꽃이 지지 않았다. 영광 불갑사에서 함평 용천사로 넘어가는 모악산은 붉은 꽃무릇 상사화가 그리운 계절을 알린다. 숲 향이 짙은 부안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을 지나 벚나무 단풍들과 눈 맞춤하다 바라보는 채색 없는 절간들. 개울물 조랑조랑한 길을 따라 봄 향기 좋다는 정안의 푸른 마곡사 가는 길. 해인사 오르는 숲길은 홍류동 계곡이 소리의 길을 만들며 절문을 들어서기까지 하늘을 가린 채 가야산의 쩌렁쩌렁한 바위마저 조용하게 만드니 가랑비 오는 가을엔 추색의 단풍이 곱다.

▲ 아산 봉곡사(천년소나무길)

얕은 언덕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아산 봉곡사의 천년 소나무숲길에는 오랜 이야기들이 전해 올 것 같고, 송광사 불일암 오솔길과 선암사 삼나무숲에는 조계산을 마주하는 대 사찰의 번잡한 일상들도 묻어둔다. 기암의 바위와 조화를 이룬 주왕산 대전사의 은행나무는 절 뜰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며 가을비에 젖는다.
퇴계의 옛길을 따라 청량사에 이르는 기암의 바위들과 마주하는 작은 숲길은 사찰을 내려 보며 걷는 하늘 길. 굽이굽이 낙동강은 흐른다.

 

▲ 부안 내소사(전나무 숲길)


그 길엔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연분홍 배롱나무 꽃이 핀 뜰을 지나 함각마루 기와의 풍경을 쫓아 석축 계단을 오른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이 산문으로 보이는 숲들과 어울려 자연과의 조화로움을 배가시켜 가장 한국적인 미의 특징을 살린 사찰이 됐듯이 호젓한 숲길의 끝에 만나는 산사는 편안한 마음을 준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을 서산 개심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청도 운문사 그리고 영주 부석사를 꼽고 있다. 서양사람들이 좋아하는 불국사,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송광사의 대사찰보다 한국인의 정서와 맞는 절집들이다.

▲ 울진 불영사(연못)

경사진 산간의 협소한 공간을 자연스러운 돌들 본래의 모양새로 석축으로 쌓아 드문드문 여유 있게 건물을 배치하니 천왕문, 범종루, 한 터 한 터에는 또 다른 세상들이 있다.
무량수전이 있는 세 번째 터로 오르는 계단은 안양문을 지난다. ‘안양’은 극락이기에 극락세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일 것이다. 빼꼼히 보이던 석등은 돌계단을 오를 때 무량수전을 살짝 비켜있어 시선의 고정은 자연스럽게 무량수전을 향한다.
무량수전 앞마당 끝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연봉들은 겹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도솔봉 장쾌한 능선도 이곳에서는 수평을 이루며 죽령 고갯길을 넘어간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에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들인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런 아름다움 속을 고요히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움을 아울러서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 영광 불갑사(꽃무릇길)

부옇게 운무에 쌓인 날이나 부슬부슬 비가 내린대도 좋다. 날씨 좋은 저녁 해거름이나 바람 선선해 곱게 단풍든 어느 날도 좋다. 소백산 오르는 까마득한 철다리에서 보던 안개가 지나가는 숲. 연화봉 깊은 계곡을 휘돌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수십 미터 폭포는 희방사의 숲길에서 넋을 잃고 쉬게 한다. 영주로 가는 길이다. 소박하고 호젓한, 그리움과 수다스럽지 않은 그 길엔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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