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최 기 종  관리사무소장
부산 구서선경3차아파트

유목민(遊牧民). [명사]목축으로 업을 삼고 물·풀을 따라 옮겨 가면서 사는 사람들(Nomadic Peoples). 유목을 하면서 이동 생활을 하는 민족. 유목민의 사전적 의미다.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이란 신조어가 있다.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유목민처럼 조직을 가볍게 해서 네트워크를 활용해 빠르게 기회를 포착하며  열린 자세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현대인들을 일컫는다.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의미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21세기는 다시 유목민의 시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른바 인터넷 시대를 맞아 닫힌 공간에 안주하는 정착민적 사고보다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유목민적 페러다임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렵 위주의 유목민 문화는 수평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항상 이동해야 한다. 농경 위주의 수직적 사회인 정착 문명권과 달리 새로운 곳을 찾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민의 사고는 장소 중심이 아니라 시간과 속도 중심이라고들 말한다.
필자는 자치관리 1곳에 오래 근무했었고 경력에 비해 위탁관리 경험이 미천해 위탁관리와 연관된 관리사무소장들의 취업 과정, 특히 이동의 불가피성에 대해 흥미롭게 듣곤 했다. 관리사무소장들의 잦은 이직은 비단 위탁관리뿐 아니라 자치관리도 마찬가지여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하는 관리사무소장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의 신유목민이며, 나그네요 하숙생이 아닐까?
관리사무소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착민의 생활근거지인 아파트 단지를 직장으로 하면서도 자의든 타의든 한 곳에 오래 근무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따라서 정주나 정착의 관념이 희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목민들이 풍부한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듯 관리사무소장들도 끊임없이 자기 계발과 정보 탐색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여 새로운 단지를 찾아 능동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관리소장이란 직업이 어차피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늘 자유롭고, 새로운 길을 만들며, 게으르지 않고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것이다.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마라 대평원의 누(Gnu 소 영양) 떼가 물과 풀을 찾아 이동하는 대장정의 곳곳에는 죽음의 사자(使者 : 사자, 하이에나, 악어 등)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잠복해 있듯이 관리소장의 앞길에도 수많은 복병(갑돌이와 갑순이 등에 의한 스트레스)들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하고 그것이 대부분의 인간이 직면하는 인생이라는 삶의 정글이 아니겠는가.
1995년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WP)는 서기 1001년 이후 1,000년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인물로 칭기즈칸을 꼽았는데 사람들이 대륙을 넘어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최초의 지구촌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생전에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보다 더 넓은 면적을 정복했는데 800년 전의 칭기즈칸이 그렇게 넓은 영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유목민적 특성에 기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들은 작은 군대지만 강했고, 속도전에 능했으며, 40㎞마다 역을 두고 5㎞마다 파발을 준비하는 등 모든 것을 서로 연결했으며 외국인도 아무런 배척 없이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고 종교나 타민족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며, 다른 문화에 대한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이는 등 모든 것을 열어 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유목민으로 생활하며 진화한 그들의 시력은 평균 4.0이라고 한다.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감지하며, 늘 먼 거리를 볼 수 있었기에, 그들만의 강력한 능력이 유전자(DNA)로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부정적인 평가도 많을 것이다. 화약, 인쇄술 등 당시로선 선진문물들이 유럽에 전파됐지만 요즘으로 말하자면 생물학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류에 피해를 끼쳤기 때문인데, 바로 페스트균의 전파이다. 당시 인류의 3분의 2가 이유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음에 내몰렸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지면도, 시간도, 초점도 맞지 않을 듯 하므로 뛰어넘어 갈 수밖에 없지만, 당시의 유럽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공포는 요즘의 핵폭탄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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