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손아귀에 착 안기는 기자용 수첩을 구입했다. 자그마치 한꺼번에 16개를 샀다. 문구점 주인이 뭐하는데 이렇게 수첩을 많이 구입하느냐고 의아해서 묻는다. 나의 나이와 안어울리는 행동 같아 보였는가 보다.
“갑자기 마구마구 사고 싶어서 달려왔어요.”
“이렇게 더운데요…”
질문을 받고 보니 좀 그렇다. 너무나 더워서 밖으로 나갈 구실을 찾다가 그거라도 사러 나가자고 생각한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느라고 얼른 답을 하지 못한 채 계산을 마쳤다.
문구점을 나와 행길을 건너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다. 골목길에서 발길을 멈추고 비닐주머니를 열어 들여다보고나서 들어올려 보듬어 안았다. 행복했다. 이러한 행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닐주머니가 축 쳐지게 늘어뜨리고 골목의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곰곰 생각해보았다. 작가로 등단한 지 24년차인데, 내가 사용하는 수첩은 거의가 거저 생기는 다이어리를 재활용하거나 해가 지난 수첩을 이용하였다.  해외여행길에 오를 때 몇 권의 수첩을 샀지만, 글씨를 잘게 써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집에서는 다이어리가 더 실용적이었다. 작은 수첩도 10여 권 남짓 꽂혀있다. 이미 사용한 다이어리는 책꽂이의 3칸 정도를 채우고 있으며 오래된 것은 등판에 1987년도 금박숫자가 찍혀있다. 
나는 나무가 죽어야 종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부터 사용하지 않은 종이가 의미없이 쓰레기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풍요의 세월이 우리 앞에 놓이면서 종이가 지천이다. 쏟아져들어오는 달력의 뒷장도 내게는 황홀하고 직장에서 날아드는 다이어리도 그 어떤 노트보다 좋았다. 해가 가도 나는 버릴 줄 모르고 쌓아두었는데 글을 쓰고부터 나에게 사랑받는 메모노트가 되어 주었다.  
최근 은행의 행사장에서 받은 수첩이 바로 내가 몽땅 산 기자용 수첩이었다. 가방에 넣고다니기도 좋고 집에서 소파에 기대앉아 영화를 보면서 메모하기도 좋아서 메모하는 재미가 새롭게 붙었다.
시대에 따라 메모지의 분류도 달라졌다. 핸드폰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기록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게 변화했다.
손아귀에 쏙 들어간 수첩에 무엇인가를 적을 때의 그 쾌감은 글로 이어질 것이므로 은근히 흥분된다. 첨예하게 반짝이는 생각을 잡아서 수첩에 꽂아두지 않으면 화살처럼 날아가버리고 만다.    
모든 선택에는 동기가 숨어있고 그 동기는 피어나자마자 마음 깊이 숨어버리거나 행동으로 이어진다. 강렬한 욕구가 아니면 그 수첩 정도는 그다지 급하게 마음을 흔들지는 않았을 터, 그래서 나는 좋다고, 참 좋다고 씨익 웃으며 지나쳤을 것이다.
두 개의 수첩에는 깨알같이 글씨를 박아쓰지 않았다. 가장 어리석은 메모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한 장에 한 개의 내용만 메모해야 그 메모를 찾아 활용할 수 있는데 글자 크기를 조절해 중요도를 구별해두고 글로 이어야 할 내용이면 별표를 하고 동그라미를 쳐둔다. 마치 편집해둔 것처럼 정리해야 넣어두는 메모수첩이 아니라 사용하는 수첩이 된다. 
두 개의 수첩을 아주 짭잘하게 사용했으며 뒤에 몇장 남지 않은 게 아쉬웠다. 그런 나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쉬울게 뭐있어. 사면 되잖아....실컷 쓰도록 사야지.’
나와 또 하나의 내가 은밀히 대화를 하다가 그만에 스프링처럼 튀다시피 일어나 땡볕 속으로 나가 문구점으로 달렸던 거였다. 배고팠다가 푸는 숟가락처럼 수첩을 거멍거멍 주워담았다. 수첩 양은 내적 에너지와 비례하고 사고싶었던 욕구와 맞물렸음을 입증한다. 쓰는 게 무서우면 못 산다. 쓰는 재미가 없어도 덜 샀을 것이다. 부풀려진 에너지가 아니길 바라면서 여름 송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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