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지항 관리사무소장(왼쪽)과 경비원이 에어컨이 철거된 경비실을 설명하며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재앙적 폭염’ 지구가 불타고 있다.
올 여름 지구는 가장 뜨거운 날씨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기상관측 역사상 올해가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정말 심각한 건 올해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지난해도 가장 더운 해였고, 그 전 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구가 계속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유지항(주택관리사 9회)씨는 지난 6월 1일자로 경기도 수원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부임했다. 올 여름 더위는 일찌감치 5월부터 시작됐고, 7월에 접어들자 푹푹 찌기까지 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이전 근무 단지엔 경비실에 모두 에어컨이 설치돼 경비원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현 단지는 정문초소에만 설치돼 있을 뿐 나머지 두 곳의 경비실엔 에어컨이 없어 한낮의 초소 내 온도는 43도까지 치솟았다. 너무 뜨거워 경비원들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 이름표가 민망해…. 오래된 컨테이너 ‘휴게실’은 그야말로 ‘찜통’이어서 탈의실로만 이용될 뿐 용도를 잃었다.

경비 본연의 업무 외에도 재활용터 관리 및 청소, 택배와 우편물 수령 업무까지 수행하는 경비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더위를 막아 줄 에어컨이 반드시 필요했다.
문제는 입주자대표회의의 부재. 비용 지출을 위해선 주민대표의 승인이 필요하지만 재적인원 7명 중 그나마 선출된 4명의 동대표들 간 내분이 생겨 구성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새로운 회장도 선출됐으나 법적으론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결재권자가 없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젊은이도 견디기 힘든 폭염에 고령의 경비원들은 비좁은 경비초소 안에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휴식도 취한다. 그것도 24시간 동안.
재해사망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였다. 입대의 부재 상황에서 경비원의 안위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관리사무소장의 책임으로 귀결되므로 유 소장은 결단을 내렸다.
7월 중순, 급한 대로 중고 에어컨 두 대를 구입해 설치했다. 법적으로 인정받진 못했어도 새로운 입대의 회장과 전임 회장에게 ‘긴급사안’임을 알리고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동대표 간 내분의 불똥이 경비실로 튀었다. 두 명의 동대표가 에어컨 설치를 수긍하자 나머지 두 명이 절차적 문제점을 제기하며 수원시청에 민원을 넣은 것. 이에 따라 시청에선 소명자료 제출과 함께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리는 공문을 보내왔다.
결국 에어컨은 한 달도 못 가 철거되고 말았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됐다.
이 사실을 안 입주민들은 분노하며 새 동대표들에게 민원취하를 요구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 와중에 경비원들만 골탕을 먹었고, 관리사무소장은 시청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상 최악의 폭염 속에 온열질환 사망자도 기록을 경신했다. 밭에 나가 일하던 농부가 쓰러져 숨지고, 홀로 사는 사람들이 잠자다 사망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고령노인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외부환경 변화에 신체적응능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그만큼 더 위험하다. 24시간 근무하는 고령 경비원의 위험은 일반인보다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관리현장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회장 최창식)는 이번 사건이 관리종사자들의 안전 및 인권과 직결되는 사안이라 판단해 적극 중재와 지원에 나섰다.
대주관 이선미 경기도회장은 “입대의 구성신고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령 경비원들의 안전을 위해 긴급조치를 취한 걸 문제 삼는 건 지나치다”며 “관리사무소장의 업무집행에 상당한 애로가 있는 여건임을 지자체에서 살펴보고 행정처분 등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전국에선 ‘경비실 에어컨 달아주기’ 운동이 폭염보다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임대아파트 입주민과 어린이까지 저금통을 털어 ‘경비 할아버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올 여름 폭염은 그만큼 ‘재앙’적이다.
【이경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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