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속리산 사실기비(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됐으며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속리산의 내역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7년(1666)에 송시열이 짓고 송길준이 써서 법주사 입구에 세웠다.
내용은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해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이 등에 10층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 4년(1653)에 옥천 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했는데 그후 충청병마절도사 민진익이 관찰사 임의택에게 일러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대웅보전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옛 기록과 기단석의 양식으로 봐 지금의 건물은 고려 중기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했고 이후 중수를 거듭했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됐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10월 4년간의 공사 끝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이후 400년 만에 옛 모습 그대로 원형 복원한 것이다.

◈삼존대불(보물 제1360호)
비라자나불을 주존(主存)으로 석가여래와 노사나불이 협시한 삼신불을 봉안했다. 연화대좌 위에 좌정한 삼신불은 흙으로 빚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로서 1624년 대웅보전을 중창하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높이 550㎝, 허리둘레 390㎝로서 우리나라의 소조불상(흙으로 만든 불상) 중 가장 크다. 삼신불의 모습은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수인만 다르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해 동안이며 옷 주름을 두텁게 표현한 이 불상은 조형성이 탄탄해 임진왜란 후의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금동미륵대불과 미륵반가사유상
신라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 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했다.
일제 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해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 상태에서 6·25 동란으로 중단됐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붕괴 직전의 시멘트 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 시멘트 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 국난 극복과 민족 화합, 2002년 한일월드컵 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 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대법회를 갖게 됐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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