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조선 헌종 때 정학유가 지었다는 월령체(月令體)의 장편가사 농가월령가는 1,024구로 농경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24절기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절기마다 다가오는 세시풍속과 절기마다 해야 할 일들이 땀과 애환으로 승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정학유는 정약용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었지.
지금은 기후의 변화와 영농기술의 발달로 겨울에도 여름 채소와 여름 과일이 나오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24절기는 거의 맞아 들어간다.
어쨌든 먹어야 살고 때로는 새참을, 때로는 간식을 함께해야 하는 우리로선 농가월령가를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올해도 벌써 하지 망종이 있는 6월이 지나가고 소서 대서가 있는 7월이요, 머잖아 입추 처서가 오는 8월이다. 초복이니 중복이니 말복은 24절기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다.
맨 앞자리에 나오는 월령마다의 한두 구절을 살펴본다.
일년지계를 세우며 새 의복을 떨쳐 입고 세배를 드리며 귀를 밝게 한다는 술을 먹고 부스럼이 삭는다는 생밤을 먹는 정월, 정월은 맹춘이라 입춘 우수 절기로다. 산중 간학에 빙설은 남았으나 평교 광야에 운물이 변하도다. 솔가지를 꺾어다가 울타리를 새로 하고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흐르는 이월, 이월은 중천이라 경칩춘분 절기로다. 초육일 좀생이는 풍흉을 안다하며 스무날 음청으로 대강은 짐작 나니 반갑다 봄바람에 의구히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속잎이 맹동한다.
모판을 하고 울 밑에는 호박을, 처마 밑에는 박을, 온갖 채소를 빈 땅 없이 심는 삼월, 삼월은 모춘이라 청명곡우 절기로다. 춘일이 재양하여 만물이 화창하니 백화는 난만하고 새소리 각색이라. 당전의 쌍 제비는 옛집을 찾아오고 화간의 범나비는 분분히 날고 기니 미물도 득시하여 자락함이 사랑홉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아 놓고 집을 나서는 사월, 사월이라 맹하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비 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떡갈잎 퍼질 때에 뻐꾹새 자로 울고 보리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 난다.
뙤약볕과 무더위 속에 장마를 준비하는 오월, 오월이라 중하 되니 망종 하지 절기로다. 남풍은 때맞추어 맥추를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빛이 밤 사이 나겠구나.  땀 흘려 흙이 젖고 숨 막혀 기진하는 유월, 유월이라 계하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대우도 시행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마구리 소리 난다.
견우직녀 이별눈물이 비가 되어 지나가고 오동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칠월, 칠월이라 맹추 되니 입추 처서 절기로다. 화성은 서류하고 미성은 중천이라. 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야 속일 소냐.
뒷동산 밤 대추 아이들 세상이고 귀뚜라미 맑은 소리에 송편이 익어가는 팔월, 팔월이라 중추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성 자로 돌아 서천을 가리키니 선선한 조석 기운 추의가 완연하다.
수고도 나눠주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구월, 구월이라 계추 되니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 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만산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
고추, 마늘, 생강, 파에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는 시월, 시월은 맹동이라 입동 소설 절기로다.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 소리 높이 난다. 듣거라 아이들아 농공을 필하여도 남은 일 생각하여 집안 일 마저하세.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해서 동지 팥죽을 쑤는 십일월, 십일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초롱불 오락가락 묵은 세배하는 마지막 십이월, 십이월은 계동이라 소한대한 절기로다. 설중의 봉만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 
나는 봄이 시작되는 입춘에서부터 겨울의 매듭을 짓는 대한에 이르기까지의 24절기는, 1년을 15일 간격으로 보름마다의 새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전 새참을 먹으면 점심이 오고 오후 새참을 먹으면 저녁이 오는 것처럼, 입춘이 오면 봄이, 입하가 오면 여름이, 입추가 오면 가을이, 입동이 오면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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