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새참이란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에 먹는 음식이다.
곁두리, 샛요기, 중참이라고도 하는 새참은 농경사회 때는 필수이며, 지금도 논밭에서 일을 할 때는 필수적으로 지급이 된다.
옛날에는 국수와 막걸리가 대세를 이루었고, 지금은 빵과 음료수나 우유 등이 제공되고, 날이 몹시 더울 때는 콘이나 하드가 덤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새참은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에 지급이 되는 간식이다. 밥을 먹고 나서 생기는 힘이 밥심이요, 배에 힘이 없으면 일에 지장이 생기는 육체노동은 새참이 꼭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또한 새참을 먹는 동안만은 잠깐이나마 허리를 펼 수 있는 휴식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휴식시간을 갖기 위해 새참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휴식의 참된 진미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안다고 했다.
바빠서 여유가 없을 때야말로 쉬어야 할 때라고 소크라테스가 말했고, 내 활력의 근원은 잠깐의 낮잠이라고 처칠이 말했다.
그 옛날 손모내기를 할 때 새참을 이고 오는 우리의 어머니나 누나는 하느님이 비밀리에 보낸 천사가 아니던가. 그 비밀 밀사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요동치는 곁눈질이, 바쁘게 흐르는 샛강이다.
그늘이 없는 뙤약볕에서도 새참을 먹는 그 장소는 천국이요, 극락이다. 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잔으로 다시 활력이 솟고 충전이 되는 농부들.
길고 긴 오뉴월의 하루해가 새참이 없었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견디기가 힘이 들었을까.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자는 그가 정치가이든 관리이든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라고 니체가 말했건만, 농사일을 하는 농부는 예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들판은 만신창이로 변하니, 그림 형제의 ‘개구리 왕자’나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도 그저 착하면 복을 받는다는 동화일 수밖에는 없나 보다. 숟가락이 필요 없는 새참을 먹는 시간은 새로운 힘을 돋게 하는 도끼날을 갈고 대팻날을 가는 시간으로 그리 길지가 않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누구는 수백억을 빼돌리고 누구는 수백억을 챙기면서 온통 애국자요, 누구는 때가 되면 현충원을 찾고 누구는 때가 되면 민주묘지를 찾으며 온통 우구지사뿐인 세상이라 해도, 이 씨앗이 이 모종이 풍년이 들기만을 바라는 사람들도 애국이요 우국이 아닐까. 그래도 세상은 눈물을 닦아주는 좋은 사람이 많아 발전이다. 들판의 쉼표인 새참이 녹색의 농경문화로 출렁거리는 사랑의 서사시요, 행복의 인문학이다.
천하장사도, 영웅호걸도, 정승판서도 먹어야 산다는 ‘농자천하지대본’도 쌀이 남아돌면서 쌀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지만, 들판에는 모내기가 끝을 맺어 땅내를 맡고 시퍼렇게 달리는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요, 벌써 초복이다. 새참을 먹고 일을 하는 농작물은 생각을 묵히고 삭혀낼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감각적인 감탄사나 영상의 이모티콘이 숨 가쁘게 범람하는 시대에 기다릴 줄 아는 씨앗의 법칙이 결코 슬퍼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 넘실저수지 아래의 논에서 대목골의 밭에서 나와 함께 새참을 먹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지금 나는 파물이 다 되어가는 고추하우스에서 빵과 수박으로 새참을 먹고 있다.
새참과 휴식, 우리들을 위한 필수 비타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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