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우리는 지금 중산층 몰락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뿐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자본주의 국가들 대부분이 중산층 몰락으로 인해 극심한 양극화의 병을 앓고 있다.
미국 상위 400명의 소득이 노동자 1,400,000명의 소득과 같다. 1대35,000이다. 하지만 세금은 노동자 140만명이 상위 400명보다 더 많이 내고 있다.
미국 경제는 꾸준히 좋은 성장을 이룩해 왔으나 실질임금은 1970년대 후반부터 제자리걸음이다. 기업들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던 건 저임금 덕분임에도 최고경영자들은 자신들의 임금만은 천문학적으로 ‘셀프인상’ 시켰다. 그로 인해 극과 극이 한없이 벌어지고 있다.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한 대학교수는 미국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체된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부터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했다. 엄마들도 일을 해야만 가계소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성노동으로도 한계에 봉착하자 1990년대부턴 장시간 초과노동으로 수입을 유지했다. 그렇게 버티던 노동자들은 지치기 시작했고 마지막 수단으로 등장한 게 ‘빚’이었다. 융자를 받아 집을 사고, 집값이 폭등하면서 그 집을 담보로 또 빚을 냈다. 그게 중산층으로 버티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터지는 건 한순간. 부동산 버블이 꺼지자 대형 금융사, 증권회사의 파산이 이어졌다. 빚을 내 집을 산 사람들은 집을 빼앗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떠안고 길거리로 쫓겨났다.
2007년 벌어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이후 세계금융위기를 몰고 왔다. 우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아니 더 혹독했다. 한국의 자살률, 노인빈곤율이 세계 최고로 치솟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중산층은 그렇게 몰락하며 소멸돼 갔다. 어느 고위관료의 표현을 빌자면 사회의 허리를 지탱하던 중산층 ‘인간’들이 ‘개 돼지’로 전락한 것이다.
‘내부자들’이란 영화에서 “대중은 개 돼지”란 대사를 들었을 때, 그저 영화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자극적 표현이라고 여겼다. 설마 현실에서 그렇게 센 말을 내뱉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국가의 백년을 설계’하는 교육부 고위관료의 입에서 “99%의 개 돼지들은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는 말이 나왔다.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죽은 젊은이를 애도하는 것도 ‘위선’이라고 쏘아붙였다. 그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일한 게 아니라 1%의 최상층만을 위해 일해 왔던 것이다.
빚 때문에 어린 자녀를 포함한 일가족이 자살하고, 노인들은 폐지를 주워 연명하는 이 파탄사회에서, 그는 개선하거나 슬퍼하기는커녕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를 낼 수도 없을 만큼 허망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린 모두 개 돼지들이다. 공동주택은 개 돼지의 ‘대형우리’인 셈이다. 1%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곳에서 그들끼리 어울려 지낸다.
국민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공무원들이 이 일로 위축되지 않길 바란다.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공무원도 대부분 서민이다.
1%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고위관료는 자신의 입방정으로 인해 개 돼지의 우리 속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중산층 ‘사람’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며 당했던 고통을 그가 깨닫게 될지 모르겠다.
1%가 99%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니다. 반대로 99%의 잉여노동 덕에 1%가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 원로작가는 “99%의 국민이 개 돼지라면, 국민세금으로 먹고 사는 그는 개 돼지 몸 속의 기생충”이라고 통렬한 풍자를 날렸다.
목포의 한 아파트 입주민이 자비로 경비실에 에어컨을 설치했다. (관련기사 5면) 한 여름 비지땀 속에 일하면서 제대로 씻거나 쉬지도 못하는 경비원을 보고 거금 150만원을 쾌척했다. 더위를 한 방에 날려준 청량한 소식이다. 그곳이 서민들이 거주하는 임대아파트여서 더욱 커다란 울림과 감동을 준다.
아파트의 개와 돼지들은 이렇게 오순도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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