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남도 사투리에 토속적 정취를 리듬감 넘치는 서정과 풍류로 노래한‘모란꽃’의 시인 김영랑.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영랑이라 부르듯 그는 한국 전통시의 맥락을 이은 불후의 서정시인이다.
영랑은 1920년대 후반부터 파도처럼 밀려오는 카프CAPE문학 모더니즘의 큰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향의 순수의식과 민족 고유의 정서를 노래하며 한국 현대시사에 순수문학의 기틀을 닦아놨다.
정지용, 박용철과 더불어 1930년 ‘시문학’ 발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언어의 정서적 이미지와 음악적 율조에 바탕을 두고 일생 동안 80여 편의 주옥 같은 시편들을 남겼다. 추상적 관념이나 상징에 매달리기보다 작품 자체의 서정성과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이른바 유미주의 경향의 작품에 충실했던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여순 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작품은 운율이 느릿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가락에 맞게 표현돼 있어 널리 애송되는 김영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고 ‘모란’하면 김영랑을 생각하리만치 모란이 김영랑의 시 세계와는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것은 국화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윤사월과 박목월의 ‘윤사월’, 해와 박두진의 ‘해’와 같이 어떤 제재를 시화해서 작가의 이미지나 시 세계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같이 꽃이란 제재와 작가의 시 세계가 일치되는 문인으로는 ‘메밀 꽃 필 무렵’의 이효석을 들 수 있다. 이효석의 생가가 있는 곳에 문학비와 그 무대인 물레방앗간이 복원돼 있는 것이나 강진 김영랑 생가에 모란의 정원이 조성돼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문학의 향취와 생활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모란이 피기까지는’는 김영랑의 대표 시이면서 한국의 서정을 담뿍 담아 시인 개인의 형상화가 한국인 전체의 정조로 확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데 그 의미가 크다.

춘향
큰 칼 쓰고 옥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의 외로운 혼은 불러어 나왔으니/ 논개!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한단 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의/ 흉측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단심//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 마디 문지르며/ 눈물을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삼경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 고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

서정시를 주로 쓰는 김영랑이 산문율을 주로 해서 쓴 독특한 시다. 이 시는 ‘내 마음 아실이’와 ‘돌담에 속삭이는 햇빛’ 그리고 ‘모란이 피기까지’와 같은 순수 서정시를 발표해 오던 김영랑이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이 심해지면서 시각을 사회나 역사 쪽으로 확대하려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게 말을 아끼고 서정적이면서도 비유나 반복법을 잘 쓰면서 서정시를 써오던 김영랑으로서는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사육신의 성삼문과 박팽년의 고고한 일편단심을 춘향의 그것으로 칭송하고, 적장과 촉석루에서 같이 남강에 빠져 순사한 논개의 일편단심을 대응해 노래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편단심을 지키는 춘향의 애틋한 정절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뚜렷한 변화로 보인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