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필리핀의 작은 섬을 여행하는 여행자를 텔레비전 밖에서 뒤따라간다. 그 섬의 피아트 산은 지금도 화산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유황냄새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른다. 산은 언제나 으르렁거리고 돌은 누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다. 
여행자가 피아트 산의 정상을 찾아가는 길에서는 어떤 생물도 만날 수 없다. 그 길 좌우로는 절리된 바위벽이 어마어마한 높이의 벽을 이루고 있고  그 길 가운데로는 물길 따라 물이 흐른다.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지나간 길이라 모든 게 녹아서 폐허처럼 돼버린 협곡이다. 지금도 협곡으로부터 부는 바람이 옆쪽의 바위에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연신 돌덩어리를 떨어뜨린다. 왠지 내 마음의 풍경을 걷는 것 같다.
6·25는 내 인생길에 용암처럼 지나갔다. 다른 동생들과 달리 같은 번지라도 내가 선 기억의 자리는 용암길이다. 주변은 초록으로 물들어도 그 길은 황폐하기만 하고 그 길에는 언제나 나만 걷거나 서 있었다.
친정 어머니와 함께 거쳐온 인생길인데 어머니는 푸른 길로 빠져나가고 나는 그 길에 수시로 갇히고 만다. 번번이 조심을 하여도 기억이 건드려지면 여지없이 그 길로 들어서서 한동안 헤매다 빠져나온다.  그 길은 피란 중 어머니의 등을 송두리째 아우에게 빼앗긴 길이라 내게는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생명감이 느껴지지 않는 길이다. 말 습관처럼 “엄마가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입을 봉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머니는 초록숲에 서 있고 나는 그 황폐한 길에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내가 선 자리에 못이 박혀서 그렇다는 것을 69세에 자각하고 못을 빼내며 마음자리 아물기를 기다린다. 존재는 있어도 모성을 실감하지 못할 때는 바라만 보는 엄마가 된다. 초록을 이고 절리된 벽에서 수시로 떨어지는 돌덩어리는 어머니의 지치고 거친 말 같아서 다칠 것 같아 가까이 가기가 꺼려진다.
낯선 여행자가 나 대신 화면 속에서 걷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 여행자를 뒤따른다. 그 사람은 기억이 작용하지 않으니 그 길에서도 자유롭고 상큼하다.
내 안의 섬, 의식이 가 닿지 않던 섬, 기억 안의 섬이 있다는 것을 40이 넘어 알게 되었다. 그것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확인할 수 없고 갈 수 없는 곳, 그 섬은 바위섬이다. 울창한 숲으로 가려져서 그냥 나무가 무성하려니 하고 지나치던 자리였다. 6·25가 지나고 나서 사회적으로 안정기를 맞아 내가 학동기에 이르렀을 때, 내 어머니는 나에게 비로소 관심을 보였다. 맏이이므로 온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던 때였다. 먹고 입기도 어려운 때 27세 내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간다고 조금 특별하고 싶었던가 보다. ‘뽀라’라는 순모천으로 교복을 맞추어 입혔다. 옷은 바위를 가릴 수는 있어도 녹거나 사라지는 역할은 하지 못했다. 내 정서 안에서 거대한 산으로 자리잡고 그 안의 동굴은 ‘눈물의 강’ 근원지가 되었다. 줄기차게 흐르며 강폭을 넓혀 40까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 길이 없어서 그냥 그런 그림이 내 안의 풍경이려니 생각하고 살다가 나는 나를 찾아 낯선 마음속 여행길에 들어선지 30년 남짓이 됐다. 참 많이 울었다. 번지수는 같지만 용암이 지나간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는 그렇게 풍경이 달랐다.
여행자는 시골마을에 숨어있는 스마딩 동굴을 찾아떠난다. 1945년에 지역주민이 일본군을 피해 이 굴로 피신했다가 1960년에 관광용으로 개발되었다는 동굴이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로부터 일말의 자유를 맛보듯 동굴도 빛을 발한 해이다. 동굴 안은 마치 인디애나 존스를 방불케 했다. 어두워서 이마에 프레시를 달고 걸어야 했으며 바지가 젖고 엉덩이께 찢어져서 팬티가 보일 정도로 험난한 길이지만 안내자가 주는 희망 때문에 끝까지 따라 가봤다.
여행자의 발길이 멎자 나도 기억의 동굴을 지나 현실로 함께 나왔다. 투사된 장면에 내가 머문다면 그것은 내 안에 상징으로 들어앉은 내 마음의 풍경이다. 이제 나는 내 마음 속 동굴 여행을 올해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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