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가난이 주는 설움은 배고픔이 가장 큰 줄 알았다. ‘가난한 여성’에겐 또 다른 설움이 있다는 것까진 몰랐다.
한 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결석한 아이를 선생님이 찾아갔을 때 학생은 “생리대 살 돈이 없다”며 수건을 깔고 누워 있었다. 선생님과 소녀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한 생산업체의 가격 인상 논란에 이어 생리대와 관련된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돈이 없어 휴지를 사용한다, 수건을 돌돌 말아 사용한다, 여분이 없어 젖은 생리대를 오래 해 질병에 걸렸다, 자주 갈지 않아 냄새 난다고 아이들이 멀리 한다 등등.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건 신발깔창을 대용으로 사용한다는 얘기였다.
대체 이게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얘기인가.
잉태의 순간부터 제 몸보다 귀하게 보살펴 준 어머니가 있고, 인생의 반려자가 돼 준 아내가 있으며, 숙녀만큼 훌쩍 커버린 고등학생 딸을 둔 아빠가 됐지만, 여성이라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과 불편에 대해선 잘 몰랐다. 생리대 한 봉에 만원씩이나 하는 줄도 몰랐다.
“내 초경의 기억은 화사하고 따뜻하고 충만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막 올라간 나에게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꽃이 비치면 엄마에게 말하렴. 팬티에 꽃이?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곧 눈치 챌 수 있었다. 겨울날 자그마한 분홍 풀꽃처럼 흰 팬티에 도장을 찍듯 갑자기 첫 꽃이 피어났다. 조금쯤 들뜨고 두려운 마음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꽃이 비쳤어. 엄마는 아주 환하게, 아주 크게 팔을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꽃’이라는 말과 엄마의 포옹. 이것은 내게 월경이 축복임을 전달한 가장 명징한 계기였다. 친화력과 화사함과 생명력을 동시에 지닌 ‘꽃’이라는 말과 환한 웃음과 포옹으로 내 초경을 맞아준 엄마에게 감사한다. 내 몸에서 꽃이 피었다고 내 초경을 스스로 말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책 ‘김선우의 사물들’ 내용 중 일부다.
모든 어머니들이 김선우 작가의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여성의 생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어른으로 가는 과정’인 줄만 알았다. 수 만 명의 저소득 가정 소녀들이 이로 인해 그렇게까지 큰 고통을 겪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열아홉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전동차에 치여 죽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천둥소리 내며 달려오는 열차를 왜 피하지 못했을까?
둘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열중하던 그 어린 청년은 천둥보다 빠르게 번개처럼 덮쳐 온 철마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가 남긴 가방엔 공구들과 컵라면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상식은 그렇게 파괴된다. 현실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것들을 한 방에 무너뜨리며 잔인하게 비웃는다.
입주민의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위해 일하는 공동주택 종사자들이 정작 입주민과 정부와 지자체와 언론에게 매도당하는 현실도 상식파괴다.
청년의 한 끼 식사로 천 원짜리 컵라면은 너무 비참하고, 소녀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만 원짜리 생리대는 너무 가혹하다. 대한민국의 ‘미래’들이 척박한 현실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
뒤집어져야 한다. 한 끼 만 원짜리 식사와 한 봉 천 원짜리 생리대여야 한다. 그게 인간으로서의 상식이다.
김선우 작가는 말한다. “월경혈이 묻은 생리대를 활짝 펼쳐놓고 들여다보라. 그 붉은 핏빛으로부터 목숨을 얻어 우리는 세상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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