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신유사옥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으나 숙종 때 갑술환국이 일어난 뒤 출세의 길이 막힌 남인들이 서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명분 위주의 성리학을 비판했고 혁신을 부르짖게 됐다. 이러한 혁신사상에 소외 계층들이 호응하게 되자 그 세력은 점차 확대됐다.
1788년(정조 12) 8월 천주교(서학)는 나라의 기강을 붕괴할 수 있으므로 엄금해야 한다는 이경명의 상소가 올라오자 조정은 사학으로 몰아세웠다. 그후 조정의 대신들은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와 이것을 철저하게 반대하는 공서파로 나눠졌다. 이에 정조는 천주교를 관대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교세는 날이 갈수록 확대될 수 있었다. 1795년(정조 19) 청국인 신부 주문모가 몰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할 무렵에는 전국의 신도 수가 4,000여 명에 달했고 1800년(정조 말년)에는 1만여 명에 달했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 권력을 잡은 정순왕후는 오가작통법을 실시, 천주교 말살정책을 펼쳤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범법 행위를 감시·규제하는 법이다. 이 법으로 다섯 가구 중 한집이라도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연대 처벌해 전국에서 죽은 사람이 수만명이 넘었다. 대왕대비에 의해 시작된 천주교 탄압에 벽파의 영의정 심환지와 공서파 대사간 목만주가 선봉이 돼 천주교 신자 이가환, 권철신 등은 혹독한 고문으로 죽었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낙민, 황사영 그리고 신부 주문모 등도 참형당했으며 주문모의 세례를 받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도 사사됐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됐다.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대왕대비는 1년 만에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형성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서학 관련자들이 사형당했지만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유배형으로 끝났다.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떠났으며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808년 봄, 정약용은 다산에 있는 한 초당을 얻게 됐는데 그곳은 윤단의 별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비롯해 시경강의보,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등 많은 책을 펴냈는데 그의 대표작 목민심서 외 48권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는 목민심서를 벼슬아치들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지방관이 수령으로 임명돼 그 고을에 부임했을 때,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떠날 때까지 가슴 속에 명심해야 할 일들을 모두 12편으로 나눠 자세하게 써놓은 책이다.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 수많은 책을 썼다. 자신의 저서를 통해 한 마을을 단위로 해 토지를 공동 소유, 농사를 지은 뒤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나누는 공동농장제도를 주장했다. 이것을 ‘여전론’이라고 한다. 또 임금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면서 백성들의 이익과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제도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그 당시 새로 일어난 신학문을 혼자의 힘으로 총괄해 완성한 실학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위당 정인보는 “선생 1인에 대해 깊이 살피어 연구하는 일은 곧 조선의 연구요, 조선 고대사상의 연구”라며 정약용에 대해 극찬하기도 했다.
선생의 고귀한 사상과 덕망, 수많은 저서를 우리는 잘 연구·보존해야 할 것이며 모든 관리들이 본받아 국력신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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