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글을 읽어본 정조가 거중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데 쓰이는 신식 기구로 이름은 거중기입니다”
거중기는 지금의 기중기와 같은 것으로 여러 책을 본 정약용이 연구해 낸 것으로 무거운 물건을 사람들이 들어 올리는 대신 거중기를 사용하니까 시간은 물론 비용도 훨씬 절약됐다. 수원성은 2년 만에 완성됐으며 그 당시 만들어진 우리나라 성 중에서 가장 발달된 양식을 갖고 있다.
정약용의 나이 32세 때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부패가 극에 달해 정조는 정약용을 암행어사로 임명해 내려보냈다. 소문대로 백성들은 서용보의 등쌀에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정약용은 서용보의 죄상을 낱낱이 적어 임금에게 보고해 서용보는 당장 파직됐으며 여기에 앙심을 품은 서용보는 정약용을 죽이기 위해 몇 차례 계략을 꾸몄다.
1775년 청나라 신부 주문보가 몰래 입국해 전도를 하자 천주교 신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이 일이 문제가 돼 정약용은 충청도 금정의 찰방(각 도의 역마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으로 좌천됐다. 한적한 곳에 있게 된 정약용은 이황의 학문세계에 빠져 ‘도선사숙록’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이황이 지은 ‘퇴계집’을 읽고 의문점이나 느낀 점 등이 세 항목으로 돼 있다. 나중에 정조가 불러 용양위(다섯 군대이니 오위 가운데 하나)에 잠시 있다가 규장각 부사직을 거쳐 1779년 승지에 오르게 돼 이때 정약용은 정조의 명을 받아 ‘규장전운’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이 책은 한자의 음을 표기한 일종의 사전이다.
공서파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며 그래서 정약용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자명소를 써 임금에게 올렸다.
정약용은 자명소에서 천주교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보다는 서양의 학문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올리자 정약용을 아끼는 정조는 그를 공서파의 화살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황해도 곡산의 도호부사(종3품의 지방관)로 임명했고 약용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지방을 잘 다스려 나쁜 풍습을 하나하나 고쳐 나갔다.
한번은 이 지방에 천연두가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는데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약용은 ‘마괴회통’이라는 의학책을 펴내서 천연두의 예방과 치료에 많은 도움을 줬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정약용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서 형조참의에 올랐다.
1800년 6월 정약용을 남달리 총애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은 벽파가 장악했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정약전, 정약종을 비롯해 이가환, 이승훈 등이 투옥됐고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 등이 죽임을 당했으며 서용보의 간언으로 정약용도 유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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