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정약용은 1762년 6월 16일(영조 38년) 경기도 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사도세자가 죽어 벽파가 득세를 하고 있던 터라 남인인 정재원은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조용히 살고 있었다.
1768년, 아버지가 영천현의 현감으로 있을 때 6살 꼬마였던 정약용은 이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거리가 멀고 가까운 까닭이로다”
1770년 정약용의 나이 9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남인들은 다시 등용됐는데 그때 정재원도 호조좌랑에 임명돼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정약용은 승지 홍화보의 딸과 혼인했다. 서울에 사는 정약용의 외조부 윤두수의 집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는데 정약용은 책 읽기를 좋아해 윤두수의 집에 자주 갔다. 어떤 때에는 나귀에 책을 잔뜩 싣고 집으로 오기도 했다. 정약용은 매형 이승훈을 통해 그의 외삼촌인 이가환과 자주 어울렸다.
이가환은 이익의 손자로 이름난 실학자 중 한명이며 정약용은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과 ‘곽우록’을 읽고 실학을 알게 돼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1780년 정약용은 과거시험을 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다음해에 다시 도전해 소과(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의 초시(1차 시험)와 본시에 합격해 진사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정약용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했으며 새로운 학문을 접하고 있는 이벽을 찾아가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이벽은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처남이라 정약용과는 사돈 간이었다.
정약용의 명석함과 학문의 열성이 정조의 귀에 들어갔고 정조가 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 보니 과연 출중하다고 느꼈음은 당연지사. 그래서 정조는 정약용에게 경연(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강론을 하게 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나이 22세 때 이벽으로부터 서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실의’를 읽게 됐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 배운 학문은 우리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천문, 지리, 건축, 수리, 측량 등 과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고 지식을 쌓아 나갔다. 정약용이 서학을 가까이 한 것은 천주교보다는 서양과학 쪽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789년 식년문과 갑과 시험에 합격해 ‘가주서’라는 벼슬을 받은 그는 강에 놓을 다리의 설계도를 작성해 정조 임금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지니까 이를 시기하는 공서파들이 정약용이 서학을 믿는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공서파의 공격에 정조도 하는 수 없이 정약용을 충청남도 한 작은 고을인 해미로 귀양을 보냈다.
“그대는 어찌하여 말 많은 서학을 깊이 공부했는가? 서학만 믿지 않았다면 내가 왜 그대를 귀양 보내야 하겠는가?”
정조는 정약용을 귀양 보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정조가 정약용을 얼마나 깊이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조는 10일 만에 정약용을 풀어 주고 홍문관 수찬의 벼슬을 줘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 벼슬은 궁중의 경서와 역사의 기록, 문서를 관리하고 학문을 연구해 임금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직책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성을 쌓기로 결심하고 정약용에게 부탁했다. 약용은 청나라에서 들어온 성을 쌓는 기술이 적혀 있는‘기기도설’이 적혀 있는 ‘고금도서집성’이라는 책을 읽으며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그는 서양식으로 쌓는 ‘수원성제’라는 글을 써서 정조에게 바쳤다. 그리고 성을 쌓는데 필요한 기구도 연구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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