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오후 3시. 능동의 어린이 대공원역에 내려 계단을 오르려는데 마치 위에서 구슬바구니를 엎은 듯하다. 사람들이 작은 구슬 큰 구슬이 구르듯 무리지어 내려온다. 계단을 다 올라왔는데도 여전히 남은 구슬이 움직이듯 사람들은 그렇게 무리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올라온 외손주들과 판교에서 온 친손주들이 능동의 대공원으로 먼저 떠났다. 어머니가 힘들까봐 아들과 딸이 집을 비워 준 격이나 남편은 수박을 잘라 갖고 뒤쫓아 가는 것이 낭만적이라고 가자고 조른다. 우리는 잘게 자른 수박을 갖고 대공원으로 향했다. 순전히 핸드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미 우리의 앨범에는 그곳의 사진이 수도 없이 들어있다. 중곡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 아이들이라 그곳은 고향동산처럼 친근하고 익숙하며 곳곳에 추억을 묻은 곳이기에 그 시간에는 과거와 현실이 제멋대로 섞이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 것이다.
잠실에서 아기 둘을 연년생으로 키운 딸도 쌍둥이 유모차를 끌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곤 했으니 그냥 집 마당처럼 익숙하고 편한 공간이다. 대단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녁에 밥 잘 먹고 힘들지 않게 재우기 위해 간다고 집을 나섰다.
그곳에 가서 보니 집에서 연상하는 것과는 상황이 영판 달랐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을까. 그 많은 사람을 품은 공원이란 공간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래도 걸을 자리가 있고 다가서면 앉을 자리가 있고, 그늘이 있고 곳곳에 장식된 볼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음악 분수가 일품이다.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했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장의자에 앉아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분수에 동화돼 갔다. 세계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분수 쇼가 오버랩되며 흥을 돋궈줬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상하고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낚으며 내 고개도 강약의 리듬을 탄다. 분수는 먼 길 오느라고 수고한 이용객과 가족들 동원해 거느리고 오느라고 수고한 엄마와 아빠의 지친 어깨에 미세 물방울 같은 응원을 뿌려준다. 다양한 군상 속에서 나는 가슴이 촉촉하게 젖는다. 딸은 고단하다고 절대 오지 말라고 했으나 놀고나서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수박은 시원해서 좋지 않던가. 대번에 챙겨가지고 가기를 잘 했다는 판단이 섰다.
시시때때로 드나들던 우리에게는 추억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어 줘 머무는 동안 이야깃거리가 풍부했다. 4살배기 손녀가 하늘로 풍선을 올려보내고 고개를 90도로 꺾은 채 한없이 올려다보던 영상, 궁둥이 실룩거리며 오빠 따라가던 딸의 영상, 비를 맞아서 차를 탈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능동에서 중곡동까지 걸었던 추억, 어린이 극무대에서 신데렐라를 보여줄 때 왕자님이 유리구두를 신기며 “아이고 발 냄새…”해 어린이들을 웃기던 장면, 그게 너무나 재미있다고 다시 보러 가자고 해 두 번 보러 갔을 때 그 대사가 없어져서 웃지 않던 손녀, 숱한 영상이 줄줄이 기억에서 올라왔다.
어디 그것 뿐인가. 지금은 중병을 앓고 있는 내 친구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줄기차게 거닐던 장소, 고등학교 스승이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에서 동기생들과 걷는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좌우를 살피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곳에는 지금 또 새로운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검지와 장지로  V자를 만들며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지…“야야 지금 거기가 서울이가?” 묻는 어느 친정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그 딸이 “어무이 쪽팔리고로 무신 서울이냐고 묻능교. 그냥 대공원이냐고 물으시소” 했다고 옆자리에서 귀띔도 해줬다. 장의자에 함께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며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던 젊은 엄마는 나에게 만나서 정말 반갑다는 인사를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한참 분수쇼를 보고 있노라니 우리 아이들이 등장한다. 잘라간 수박을 나누어 먹이는데 옆 의자의 노인이 보였다. 나는 얼른 한쪽을 들어다 드렸더니 들고만 있다. 조금 무안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상황이 이해됐다. 그 노인은 작은 수박 한 쪽을 두 손녀에게 베어 먹이고 손을 닦았다. 때는 이미 그릇을 비운 때라 더 배려할 수가 없었다.
세상 어린이들의 5월은 과연 푸른가. 저들의 세상이 맞는가. 오히려 일부 어린이들의 상처를 들춰내는 5월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공원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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