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나, 찔레 앞에서 불붙듯 피어나는 영산홍 무리를 보면서 내 가슴도 다 타버릴 것만 같았지요. 미처 희게 탈색하지도 못하고 반 연둣빛으로 피는 불두화를 보면서 급했구나 생각했지만 나는 늦어도 좋다고, 마저 색을 지우고 하얗게 승화돼 피어나자고 작정했지요. 행여나 꽃잎을 열기도 전에 향이 빠져나갈까 봐 꽃봉오리가 야무지게 오므리고 필 준비 중입니다.
나와 쪽동백과 불두화, 아카시아는 하얗게 탈색하기로 합의했어요. 성급한 불두화는 나보다 미리 피면서 서서히 정화를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꽃멀미를 해서 피어야 한다고 그랬지요. 하지만 나는 때에 맞춰 피려고 햇빛을 마저 모으는 중이랍니다.
어제는 날 사랑하는 예인 둘이서 내 앞에 머물다 가면서 혀를 찼어요. 좋은 것은 미물이 먼저 알고 내 꽃송이 근처에 진딧물들이 판을 벌였거든요. 얼마나 포식을 했는지 배가 연두색 물로 가득합니다. 그 분들이 털어도 소용이 없어요. 달라붙어서 바닥을 내려고 들어요. 늘 조금의 고시레를 해야만 하는 것 같아요. 그 가지는 진딧물에게 내주기로 했어요.
하얀꽃, 나, 찔레는 서럽고 아쉽고 그리운 님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아요. 나는 어린 자녀 셋을 두고 저승길 가는 아버지의 무덤에 향기를 분사한 적이 있어요. 어린 것들이 하얀 국화꽃 이불을 무덤 위에 덮기에 몇날 며칠 내가 그 곁에서 향기를 뿜었답니다. 엄마 먼저 보내고 아빠까지 보내는 그 아이들을 대신해서요. 내 향기가 서럽고 보고 싶은 냄새로 기억될 것 같아서 피기가 조심스럽기도 해요.
찔레덤불이 있는 오솔길을 지날 때, 그녀는 갈치장사 아주머니가 생각났다네요. 비린내 가득 묻은 앞치마를 피해 고개를 젖히고 아파트 울타리에 기대어 피는 내 향내를 맡더니 천국이 별거냐고 이것이 천국이라고 했대요.
그러고 보니 5월에 단 한사람에게라도 천국을 선물할 수 있다면 나는 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꽃과 향기를 준비합니다. 향이 좋은 것은 가시가 있으니 멀리 두고 보라는 말입니다. 모란은 향이 없잖아요. 나는 별로 화사하지도 않고 꺾어다 꽃꽂이를 하기에는 무리가 되는 야생성이라 개성이 강해요. 열정적이라 말하기도 해요. 천연 향기를 내뿜을 수 있지요. 모란이 실크라면 나는 무명같아서 되레 마음에 든다는 분도 있어요. 하얀 꽃잎은 다림질을 하지 않은 면포같이 구긴듯 자연스럽거든요. 겉은 희고 속은 백열등 불빛색이랍니다. 단지 꽃과 향기로만 사랑받을 것 같지만, 줄기나 뿌리가 다 버릴 게 없는 식용이며 약재 식물이랍니다. 그것도 피를 정화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하네요. 꽃이 지고 나면 까칠하고 잎새도 톱니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 얼씬거리면 상처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나 찔레는 노래가사로, 시제로 관심을 받습니다. 그것 뿐이겠어요. 내 속성을 알기만 하면 곁에서 나눠먹자고 해요. 나를 기대고 자란 찔레꽃 뿌리 버섯은 특별대접을 받는답니다.
공원의 찔레꽃이 피는 길을 지나는 분들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반갑지요. 유독 흰 꽃인 내가 피기를 기다리는 것은 속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하니 궁중의 뜰에는 언감생심 얼씬거리지 못해요.
 내 앞에 머물던 여인이 지난 밤 꿈 속에서 잘 닦인 하얀 수조를 봤다네요. 물막이 바킹이 빠져서 수조는 말라있고 그 안에는 두 마리의 예쁜 열대어가 입을 벌리고 뒤집어져 있고, 한 마리의 도미가 퍼득거리고 있더랍니다. 물은 생명이라 부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미친 여인은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습니다. 내가 피면 그녀 가슴에 향내를 담고 가서 그 수조에 물을 채워주고 올 수 있겠느냐고요. 그 여인은 이미 그 깨끗한 수조가 어머니 가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세 마리의 물고기도 세 사람임을 알지요. 수조는 찔레꽃잎보다 더 하얗게 빛났다고 했지요. 내 앞에 머물던 여인은 나의 가시가 향기를 따라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그녀는 어느새 범죄자가 범죄 현장을 확인하듯 그녀가 엄마네를 엿본다는 것을 꿈이야기로 알아봤습니다.
내가 대신 향기를 전하겠습니다. 그녀 어머니네 동네에도 찔레가 흐벅지게 핀다고 꿈으로 면죄부를 받은 셈 치고 평화를 누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든 모든 색을 탈색하기로 했잖아요. 멀리 있어도 영혼은 달려가더라고 전하겠습니다. 존재와 하얀색과 향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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