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용 칼럼

 


 

류 기 용 명예회장

‘계절의 여왕’ 5월은 가정의 달이자 축제의 달이기도 하다. 근로자의 날을 비롯해 어린이날, 어버이날, 입양의 날, 석가탄신일, 스승의 날, 가정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각종 기념일이 줄을 잇고 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가족이나 가정과 관계가 깊다. 박목월의 시 ‘가정’에는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오롯이 배어 있다.
가난한 시인 아버지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으며 살아가지만 ‘아홉 마리 강아지’ 같은 자식들을 위해 ‘아랫목’을 내어주면서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전통적인 농업국가의 대가족 정주주거 형태 속에서 충효와 가족 사랑을 중시했던 동방예의지국의 전형적인 가정 모습이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를 찾은 아놀드 토인비는 한 인터뷰에서 “만약 지구가 멸망해 인류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야 할 때 꼭 가져가야 할 문화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한국의 효(孝) 문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작금의 사정은 어떠한가. 최근 두 달 사이에 일어났던 두 노부부의 비극은 효 모범국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강변 승용차 안에서 아내의 손을 꼬옥 잡은 채 세상을 버린 70대 남편은 유서에 ‘암에 걸린 아내의 병세가 좋아지지 않아 같이 가기로 했다’라고 썼다. 또 다른 어느 노부부는 ‘우리는 가족이 없다’며 화장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긴 채 10평 남짓한 오피스텔 거실에서 숨진 지 6개월 만에 발견됐다. 노인도 노인이지만 은퇴한 중년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어느 모임에서 들은 중년부부의 얘기다. 어느 날 동창회에 다녀온 아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남편이 불안한 표정으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한참을 노려보던 아내는 다들 남편이 없는데 자신만 남편이 있다면서 ‘이제부터는 집안에서 숨도 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퇴직 후 남자가 집에서 밥을 먹는 횟수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예컨대 집에서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 먹으면 ‘일식이’ 두 끼 먹으면 ‘두식놈’ 세 끼를 다 먹으면 ‘삼식 새끼’란다.
쓸쓸하게 세상을 놓아 버린 두 노부부나 농담 속의 살벌한 중년 부부들도 젊어 한 때는 죽고 못 살 것 같은 애틋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연애 시작 무렵엔 밤을 새워가며 ‘이름 모를 소녀에게…’ ‘사랑하는 그대에게…’ ‘희야! 네가 없는 세상은…’ 등등 온갖 미사여구를 편지지에 실어 날랐을 것이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에는 ‘당신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했을 것이고 노을진 여름 바다에 누워서는 ‘별도 달도 따 줄 것’처럼 말했을 것이며 노란 은행잎을 책갈피에 접을 때 눈가에 촉촉이 이슬이 맺히는 연인을 보며 ‘그 여린 마음을 평생 지켜주리라’ 다짐했을 것이고 눈 내리는 겨울날 자신의 외투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행여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을 나눴던 젊은 연인이 왜 이토록 살벌하게 변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모진 세파에 찌들었기 때문일 터이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승진을 위해, 자식 교육과 집 장만을 위해 그저 앞만 보고 내달렸을 것이고 아내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아무개 부인, 아무개 엄마가 돼 오로지 가족의 뒷바라지만 하다 보니 그 애틋했던 사랑의 자리에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 들어 안게 되고 그 무관심이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어디 노인이나 중년만의 일이겠는가. 영아 유기와 아동학대를 비롯해 빈곤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되고 있는 어린이만도 68만여 명에 이르고 취업과 생계의 어려움에 지친 청년과 가장들의 신음 소리는 곳곳에서 넘쳐난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을 거쳐 원자가족으로 분열되는 동안 공동체는 붕괴된 지 오래다. 더구나 물질만능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사상까지 가세하면서 가족과 가정의 의미는 갈수록 빛이 바래가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경제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물질적 가치에 대한 경도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물질문화에 휩쓸려 비인간화돼가는 사회를 지양하고 정신적 만족과 풍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풍요가 곧 삶의 만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 찬란한 신록의 계절 5월에 정녕 우리가 좇아야 하는 궁극의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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