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다산 초당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 초당은 실학의 큰 스승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후반부 10여 년을 기거하던 곳이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를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양성과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山亭)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하게 됐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자료를 수집·정리·정서·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書閣)에 귀를 기울여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다산사경(茶山四景)
다산 정약용은 그의 글에서 다산4경을 묘사했는데 약천藥泉, 다조茶俎, 석가산石假山, 정석丁石이 새겨져 있는 암벽병풍이다. 그의 글에는 약천과 다조가 나오는 시가 있다.

푸른 돌 평평히 갈아 붉은 글자 새겼으니/ 차 끓이는 조그만 부뚜막 초당 앞에 놓여있구나/ 반쯤 닫은 고기 목 같은 아궁이엔 불길 깊이 들어가고/ 짐승 귀 같은 두 굴뚝에 가는 연기 피어나네./ 솔방울 주어다 숯 새로 갈고/ 매화꽃잎 걸어내고 샘물(약전) 떠다 더 붓네./ 차 많이 마셔 정기에 침해됨을 끝내 경계하여/ 앞으로는 단약화로를 만들어 신선되는 것을 배워야겠네.

◈다산 유적 -사적 제107호
강진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돼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기간 머물며 후진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돼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